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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 Jan 22. 2021

결국 하지 못한 말

Minifiction


“으 추워. 엄마 세탁기 멈췄어. 5E라고 떠있고 뭘 눌러도 안돼” 

잠옷만 입은 채 베란다에 나갔다 온 그녀의 호들갑에 정순은 익숙하다는 듯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며 말했다. 

“올해는 유난히 춥네. 물 끓여줄 테니까 연결 호스에 살살 붓고 세탁기 다시 돌려봐.”

“그건 엄마가 해. 요즘 집안일을 왜 이렇게 시키는 거야.”

“이제 너도 네 살림하려면 알아둬야지.”

“또 그 말이야. 30년 넘게 안 했는데 이제 와서.”

“그래서 지금 가르치잖아. 이제 다 네가 해야 할 거 아니야.”

정순이 건네주는 주전자를 받으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한마디 하려고 입을 떼는데 눈시울이 붉어져있는 정순을 보곤 뒤돌아 베란다로 갔다. 그녀는 일주일 뒤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정순이 시키는 대로 하자 시끄럽게 빨간불을 깜빡이던 세탁기가 조용해졌다. 그녀가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멈추지 않던 소리였다. 세탁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빨래를 시작했다. 그녀에게 정순은 완벽한 엄마였다. 그녀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물건도 정순이 찾으면 금방 나왔다. 휴대폰 기능은 복잡하다고 하면서 가전제품에 뜨는 에러번호만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금방 고쳤다. 정순은 베테랑 주부였다. 


정순은 6남매 중 막내로 다섯 번째 만에 얻은 아들 뒤를 이어 ‘하나만 더’하는 부모의 기대 속에 태어났다. 어른들의 실망은 아들을 더 귀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정순은 막내딸로 자랐다. 정순은 언니들처럼 집안일을 돕거나 야간학교를 다니며 번 돈을 살림에 보태지는 않았지만, 오빠처럼 아버지와 같은 상에서 밥을 먹거나 넉넉한 용돈을 받지는 못했다. 정순은 언니들과 다르게 자신이 일반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을 집안 형편이 나아졌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정순이 대학을 꿈꾼 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고3 진학상담 날, 딸은 대학에 보낼 생각이 없다는 부모님의 단호한 말에 충격을 받고 먹지도 말하지도 않았던 적이 있었다. 오빠는 용돈을 주며 응원했고 언니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주말 내내 울며 누워 있는 정순에게 넷째 언니가 몰래 빵을 주러 왔었다. 정순은 빵은 고맙지만, 응원이 아니라 설득을 하러 온 거면 나가라고 했고 넷째 언니는 깨물고 있던 입술을 풀어 숨을 몰아 내쉰 다음 말했다. 중학교 대신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한 이야기, 타지에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며 겨우 모은 돈을 살림에 보태라며 찾아온 부모님의 말을 들었을 때 기분. 정순은 넷째 언니에게 위로도 대답도 하지 못했고 넷째 언니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정순의 방을 나갔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어.”

고등학교 졸업 후 일을 시작한 정순의 월급은 오빠 학자금이 되었다. 


그녀는 최근에 정순의 달라진 말과 행동이 고민이었다. 그녀의 결혼이 가까워지면서 정순은 평소와 달리 집안일을 시키며 앞으로는 다 그녀 몫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과 살림에 막연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녀보다 더 걱정하는 엄마의 반응을 보니 정순과 있는 시간이 점점 불편해졌다.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다고, 남자 친구와 집안일은 같이 하기로 했다고 얘기했지만 정순은 그렇다면 다행이라는 말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녀는 정순이 낯설었다. 그녀의 걱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결혼 준비로 바빠지면서 정순의 외롭다는 말이 늘었기 때문이다. 정순에게 취미이자 특기는 가족이었다. 그녀도 자신이 정순의 유일한 친구라는 걸 알았지만 이제는 가족이 아닌 다른 취미가 필요한 시기라 생각했다. 그녀가 빈 주전자를 정순에게 건네며 물었다.

“엄마, 요즘에는 수영 안가?”

“코로나19 때문에 수업하는지 모르겠네”

“아니면 새로운 걸 배워 보던지.” 

“그럴까. 뭘 하면 좋을까.”

“뭐하고 싶은 거 없어?”

“글쎄. 엄마는 뭐를 잘할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몇 가지 알려줘 봐 봐.”

“그것보다는 하고 싶었던 분야를 생각해봐.”

“너랑 얘기하면서 알아보는 거지.”

“너무 막연하잖아.”

그녀는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고 순간 분위기가 서먹해졌다. 그녀는 정순이 답답했다. 정순은 막내딸로 태어나 언니들과 달리 귀하게 컸다는 말을 그녀에게 자주 했다. 그녀도 엄마의 순수함을 그렇게 이해했다. 하지만 삼촌과 달리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아쉬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삼촌을 위해 상속 포기각서에 사인한 이야기 끝에 “그래도 나는 언니들과 달리 귀하게 컸어.”라는 정순의 말이 어느 순간부터 불편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먼저 생각하기 전에 누군가 정해주는 선택지에서 고르려고 하는 점이나, 이제 다 네가 해야 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정순이 안타까웠다.

“그럼 독서모임 해볼래? 사람 만나서 얘기도 하고.”

“그건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 자신 없는데.”

“저번에 가구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었지.”

“맞다, 그랬지.”

“목공 배워볼래?”

“재미있겠다. 그런 건 어디서 가르쳐줘?”

“내가 알아볼게.”

라는 그녀의 말에 정순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역시 내 마음 알아주는 건 너뿐이라니까.”

이 말도 언젠가부터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말 중의 하나였다. 사랑하는 정순에게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일은 그녀에게 언제나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겨질 정순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정순의 밝은 얼굴에 오늘도 결국 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할 수 있길 바라며 생각한다.


‘엄마, 엄마가 하고 싶은 건 엄마가 결정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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