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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Mar 01. 2022

할머니의 자리

나의 어른들을 이해하는 일은 나를 이해하는 일이다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다. 요양원 원장님은 가족들에게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방금 전까지 밥에 상추쌈을 싸서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목 아래서 배꼽까지 묵직한 느낌이 들면서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언젠가 올 줄 알았지만 이렇게 올 지 몰랐던 시간이다. 저번처럼 이번 고비도 넘기실 수 있을까.


사람이 늙으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잊고 지낸 것 같다. 엄마도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병과 마음의 고통이 쌓여서 죽었고 주변에서 가까운 이들 중에 늙어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별로 없다. 내가 아직 젊은 건가.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어려워 할머니 면회가 거절되었지만 이대로 임종도 못 보게 될까 싶어 요양원에 거듭 전화를 걸어 겨우 면회를 승낙받았다.


할머니의 삶에 문이 닫히고 할머니가 그 닫힌 문 너머로 걸어가면 그가 가진 아픔과 슬픔도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할머니의 아픔은 그대로 죽은 자의 몫이 되어 그 고통들을 할머니는 짊어지고 가게 될까. 죽은 뒤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는 종교를 가진 나이지만 이 생에서 할머니의 행복한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는 나는 죽은 후 할머니가 행복하다거나 평안한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생전 겪으신 마음의 짐들을 어깨와 머리에 무겁게 이고 가실 것만 같아서 걱정이다.


할머니는 자식을 둘이나 먼저 잃었다. 젖먹이 둘째 아들을 6.25 때 홍역으로. 장성했던 아들을 성인이 다 되어서. 그리고 막내딸이었던 우리 엄마를 십 년 전에. 엄마를 보내고 나서는 그나마 붙들고 있던 삶의 의지가 타의로 놓쳐진 것인지 자의로 놓아버리신 건지 몸에 힘이 빠져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그때부터 할머니의 요양원 생활이 시작되셨다.


어릴 적 할머니 등에 업힐 때니 학교에 가기 전일 것이다. 슬로우 슬로우 퀵퀵. 해가 지기 시작한 느즈막한 오후에 나를 등에 업은 채로 춤 연습을 하던 할머니의 몸짓이 생각난다. 슬로우 슬로우 퀵퀵 하는 말소리와 할머니가 발을 하나 땅에서 뗄 때마다 느껴지는 진동이 할머니 등에 대고 있던 나의 볼로 전해졌다. 잠에 들라고 했던 몸짓이었겠지만 오히려 그런 몸동작들은 나를 잠에서 깨우기 십상이었고 그럴 때면 얼굴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돌려가며 볼을 등에 번갈아 기대길 반복했다. 그것도 효과가 없으면 거실 한 쪽에 2미터도 넘는 큰 어항 속 쉴새 없이 헤엄치는 금붕어들을 보며 잠을 청했다. 찬란한 주황색과 타오르는 듯한 빨간색을 가진 아이들. 탁한 허연색에 코부터 이마까지 점이 박힌 아이들. 얇아서 투명하기까지 했던 금붕어들의 꼬리를 눈으로 따라가다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깨어보면 안방이었다. 볼에는 입꼬리로 침이 흐른 것인지 딱딱하게 뭔가 굳어있었고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집에 아무도 없을까봐 엄마, 할머니, 를 차례로 불렀었다.


엄마는 부재중일 때가 많았다. 할아버지가 만든 이층집에서 이층엔 외삼촌 식구들이 아랫층에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뒷채에선 엄마와 내가 살았다. 나는 대부분 할머니가 있는 일층에서 지냈다.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아 과자를 사먹고 학원비를 받아서 냈다. 아침이면 할머니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학교를 갔고 할머니가 빤 교복을 입었다. 수능을 보고나서 대학교 논술시험을 보기 위해 다닌 논술학원도 할머니가 준 돈으로 등록했다. 할머니는 나의 비빌 언덕이었다. 엄마가 없는 밤이 서러웠어도 무섭지 않았던 이유는 할머니 때문이었다.


엄마와 할머니는 자주 싸웠다. 딸과 엄마야 싸울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지만 어린 내가 보았어도 빈도가 잦았고 강도가 셌다. 그 둘의 싸움에는 밀도 높은 에너지가 흘러 나의 모든 기운을 다 흡수해버릴 듯 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엄마 때문이라는 할머니에 대한 엄마의 원망을 들으며 자랐다. 어릴 적 소풍에 갈 때면 할머니는 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을 한 솥 해다가 선생님들 도시락을 싸줬다고 한다. 걱정이 된다는 연유로 엄마는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 할머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불안과 할아버지의 알면서도 모른 체 했을 비겁한 방임. 친구들도 못 사귀게 하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하지만 엄마에게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가 더 분노를 표출하기 만만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엄마에게 들은 할머니 이야기는 참 헷갈렸다. 언제는 한없이 헌신적인 사람임과 동시에 딸을 구속한 나쁜 사람이었으니까. 엄마는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어린 내가 누군가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늘 혼란을 주었다. 엄마의 말이 절대적이었기에 엄마의 인식대로 할머니를 원망도 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엄마가 얼마나 속을 썩였으면 그렇게 엄마를 못 살게 굴었나 싶다. 엄마의 자유로움은 파괴를 동반한 것 아니었을까. 책임있는 자유를 누릴지 몰랐던 엄마에 대한 불신이 그에 대한 억압으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안쓰럽고 귀한 딸을 위해 한 사랑인데 그것이 그 딸에게는 속박이었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는 그런 전철을 밟게 하기 싫다며 나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했다. 말이 자유지 거의 방임이었다. 술을 마시느라 정신이 없던 엄마의 변명으로도 느껴졌다. 딸에 대한 자신의 부재를 ‘방목형 육아’라는 의도된 육아관으로 메우려는 자기 합리화 같아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야 버려진 아이가 아닌 의도된 목적을 가지고 잠시 버려진 아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여 애썼다. 우리 엄마는 날 일부러 이렇게 키우는 것이라고.


돌아보니 그것이 자기합리화든 아니든 엄마의 그런 육아 방식이 나와 맞아떨어진 것 같다. 잘 하다가도 누군가 하라고 하면 기분이 상해 놓아버리는 내게 공부하란 한 마디 하지 않았던 엄마 덕분에 스스로 마음을 먹고 계획을 세우고 공부했었다. 그래서 성취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 주도적인 게 무엇인지 삶 속에서 나 혼자 부딪혀가며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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