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문을 들어서면 아이는 머리를 푼다
아침마다 초등학교 1학년 딸 아이 머리를 땋아준다. 이마 라인 쪽의 머리카락 조금을 잡아서 땋은 후 고무줄로 마무리를 한다. 방금 묶은 한 가닥을 나머지 머리와 합쳐 하나로 묶는다. 튀어나온 잔머리 없이 산뜻한 포니테일 스타일의 아이를 보면 내 마음까지 시원하다. 학교에 간 아이 사진은 담임 선생님이 종종 찍어서 하이클래스라는 앱에 올려주신다. 정성스레 묶은 아이의 머리가 사진에서는 풀려있다. 생각해보니 퇴근 후 6시에 만난 아이의 머리는 늘 풀려있었다. 묶은 지 오래 돼 고무줄이 헐거워 풀린 줄 알았는데 아예 학교에서부터 머리를 푼 것이다.
학교가 끝난 후 아이는 “개똥이네 문화놀이터”에 간다. 하교 후 돌봄을 제공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아이는 전래놀이를 하고 바느질 수업과 미술 수업을 듣고 훌라춤을 춘다. 퇴근 후 엄마를 만난 아이는 반가움이 아닌 난색을 표한다.
ㅡ엄마 나 여태 술래하다가 이제 막 도망갈 수 있게 됐는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지난 주 토요일엔 아이와 함께 강연을 들으러 갔다. 지하철을 타는 김에 여덞살이 된 아이의 교통카드를 만들기로 했다. 자신의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든 아이와 함께 편의점으로 향했다.
ㅡ솔아 돈은 그렇게 손에 쥐고 팔랑팔랑거리며 걸으면 안돼 주머니 속에 넣어 중요한 거니까.
ㅡ알아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
뭘 알아.. 방금까지 해맑게 웃으며 만원 지폐로 바람개비 돌리듯 걸었잖아
이 말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까지 다물어야 하는 걸까. 나의 실수를 아이가 반복하는 게 싫어 자꾸만 말이 많아진다. 말로 해서 피하거나 도망갈 수 있는 게 실패가 아니란 것을 아는데도.
ㅡ솔이야 저기 세븐일레븐 가면 초등학생 교통카드 주세요 해봐 네 교통카드니까 네가 만들어봐 엄마 옆에 있을게
편의점에 도착한 아이는 주인 아저씨와 대치 중이다. 아저씨를 마주한 채 눈싸움이라도 하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서 있었다. 내가 대신 나서 4,000원 짜리 교통카드를 구매하고 아이가 가져 온 돈으로 충전을 했다. 카드를 손에 넣은 아이. 아직 손이 작아 교통카드를 든 아이의 손이 요렇게 저렇게 자주 모양을 바꾼다. 손에 쥐긴 했으나 카드가 큰 지 모서리 네 개가 아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삐져나온다.
망원역에 들어가 게이트 위 CARD 라고 써있는 사각형 안에 아이가 카드를 댔다. 매번 게이트 아래로 허리를 숙여 지나가거나 카드를 찍은 나와 바짝 붙어 게이트를 통과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자기 차편에 대한 값을 지불한 순간. 카드를 찍자 “어린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나온다. 미소를 머금었지만 들키기 싫은지 입술에 힘을 잔뜩 주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하지만 이미 아이의 광대가 위로 올라가있다.
사당에 가기 위해 삼각지에서 4호선을 갈아탔다. 다리 느낌이 이상해서 보니 큰 딱정벌레가 앉아있다. 너무 놀라 다리를 미친듯이 털었고 딱정벌레는 지하철 좌석과 좌석 사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 가운데로 떨어졌다.
ㅡ지하철이 흔들릴 때마다 우르릉 깡깡 번개치는 기분이겠지 엄마
ㅡ너무 밝아서 눈이 부실 것 같아 엄마. 쟤 구해줄까
딱정벌레는 다행히 우리가 내릴 동안 그 누구에게도 밟히지 않았고 우리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사당에 도착해서 나는 강연을 듣고 아이는 신나게 놀았다. 강연장 한 켠에 마련된 아이들 전용 공간에 전에도 몇번 보았던 친구들을 만났다. 두시간 짜리 강연이 끝나고 가보니 얼마나 뛰어논 것인지 볼이 선분홍색을 띄고 머리카락은 땀으로 엉겨서 얼굴에 가닥가닥 제 멋대로 붙어있다.
집으로 가기 위해 탄 지하철 은색 딱딱한 의자에 앉은 아이가 자꾸만 엉덩이를 뒤로 뺐다 앞으로 걸쳤다 오두방정이다. 지하철 의자가 누군가가 앉기엔 애매한 길이와 높이라는 사실이 새삼 와닿는다.
6호선으로 갈아탄 후 두 자리가 비어있는 노약자석에 얼른 아이를 앉혔다. 아이를 앉히고 앞에 서 있었는데 탈 때 봤던 두 모녀가 솔이 옆 빈 자리로 온다. 성인인 딸이 얼른 빈자리에 엄마를 앉힌다. 딸과 엄마가 앉아있는 의자 앞에 똑같이 딸과 엄마인 내가 서 있다. 언젠가는 나를 앉히고 서 있을 아이 생각을 한다. 그런 미래가 빨리 오지 않았으면 했다.
집에 온 후 옷을 갈아입은 솔이가 내게로 와 안긴다. 그러고선 은근스을쩍 내 가슴에 입술을 대고 붕어처럼 입술을 뇸뇸 거린다. 그러더니 이젠 내 티셔츠에 코를 박고서 있는 힘껏 들숨을 채우고 짧게 날숨를 뱉는다. 한 스무번 쯤 반복했을까.
ㅡ충전 완료…
이러더니 곧장 지 책상으로 가서 연필과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며 자기만의 시간 속에 빠진다.
내 무릎에 엉덩이를 파고들어 젖을 빠는 시늉을 하는 아이가 학교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엄마가 열심히 묶어준 머리를 촥 풀어버리는 상상을 했지만 잘 그려지지 않는다. 아직은 내 안에서 통합이 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다.
동생과 싸우거나 무언가 맘에 들지 않으면 해명하거나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책가방에 조용히 자기 옷과 필통 학용품을 넣은 채
ㅡ나는 집을 나갈 예정
저 문장을 뱉고 위협 아닌 위협을 하며 책가방을 든 채 나가진 않고 현관문을 맴도는 아이. 어이가 없고 웃음이 피식 나고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이 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모양이 변한 거란 사실을.
내 안에 고정된 형태의 익숙하고 편한 사랑을 떠나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오래 전 구축된 아이와 나와의 관계 안에 담긴 내용물들을 바꾸어 담는 일이 달갑지 않다. 더 커 갈 아이와의 덜 험악하고 더 편안한 공존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 완벽한 아이도 완벽한 어른도 아닌 그 어떤 중간의 존재와의 공존을 위해 나는 오늘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사이에서 입을 꾸욱 다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