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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an 09. 2024

이층집

붉은 장미 넝쿨이 대문 지붕 위를 두르고 대문 허리까지 내려와 그득그득 피던 이층 짜리 집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곳에서 이십삼 년을 살았으니 내 생의 반이 넘는 시간이 그곳에 묻혀있다. 동네에 있는 대부분의 집들이 사라지고 빌라가 지어질 때도 우리 집은 막바지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살던 집이 허물어지면서 멀지 않은 곳으로 떠났다고 들었다. 장미 넝쿨이 입구에서부터 반기는 그 이층집에 사는 사람 중 나는 아래와 위층 그리고 뒤채를 가장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날 즈음 외할아버지가 직접 땅을 사고 설계해서 지었다는 집. 일층에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층에는 외숙모와 외삼촌과 두 언니들, 뒷채에는 엄마와 내가 살았다. 일층에서 나와 온갖 화초와 나무들이 차지하고 있는 마당을 양옆에 두고 바닥에 깔아놓은 사각형 돌 블록을 따라가다 보면 기다란 통로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엔 빨랫줄이 서너 개 길게 매달려 있었다. 그곳을 지나면 뒤채가 나왔다. 나는 엄마가 술을 먹지 않을 땐 그곳에서 엄마와, 엄마가 술을 먹을 땐 일층에서 조부모와 지냈다. 심심할 땐 언니들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은행집이라 불렸는데 그건 할머니의 첫째 아들인 외삼촌이 은행장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어릴 때 그것이 은행나무의 은행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본사를 둔 그 은행에 일을 보러 삼촌은 종종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삼촌이 오는 날이면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삼촌이 가져온 큰 가방 속 ‘일제’라고 불리는 물건들을 구경하기 바빴다. 가방 안에는 부피가 큰 일제 전기 밥솥과 드라이기, 도자기 식기부터 화장품과 과자까지 다양했다. 그 물건들은 이 집에 사는 어른 여자인 할머니와 외숙모, 엄마에게 분배되었다. 큰 것들의 주인이 정해지면 자그마한 것들을 두고서 할머니의 친구들이 모였다. "이 댁 아들이 또 일제 물건을 가져왔나봐. 일제는 달라 확실히." "아유 언니는 복도 많다. 누가 이런 것들을 이렇게 만져보누." "영근이가 참 효자라니까. 제 아내만 챙기는 게 아니라 혼자 된 자기 여동생이랑 엄마까지 챙겨서 물건을 사 오잖아. 그런 아들이 어딨어." "그래서 아내 속이 터지는 거 아닌가 몰라." "영숙이는 요즘 만나는 남자 없대? 걔가 혼자 되고 애는 딸려 있어도 인물은 좀 되잖어. 남자 하나 만날 법한데."


영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엄마는 아빠와 결혼 후 이 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빠 입장에서는 신혼 때부터 처가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그 둘은 얼마 되지 않아 헤어졌고, 엄마는 원가정인 부모와 오빠를 떠나지 않고 딸인 나까지 데리고 친정에 뿌리를 내렸다. “"민주야 너 이 집에 사는 게 눈치 보이니? 외숙모나 외삼촌, 언니들한테 말이야. 혹여라도 그러면 그러지 말라고. 이 집이 할아버지, 그니까 엄마의 아빠 거잖아. 너나 나나 당연히 이집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랑 너랑은 다른 거 아니. 이 동네 애들은 대부분 다 세 사는 애들이야. 그런데 우리는 우리집이야. 세 살면 얼마나 불편한지 너는 모를 거야." 사실 나와 엄마가 동네 사람들과 가장 다른 점은 내게는 아빠가 엄마에게는 남편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엄마는 자꾸만 다른 것들을 찾았다. 셋집이 아니라 우리집에 산다는 걸 강조하던 당시의 엄마는 십삼 년 뒤 우리가 이 집에서 쫓기듯 나와, 보증금 천오백짜리 월셋집으로 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유년의 기억은 장미가 넘실거리고 초여름 라일락 냄새가 짙게 풍기던 그 집으로 가득 차 있다. 넓은 마당에는 감나무와 치자나무, 라일락 나무와 같이 큰 나무들이 들어설 자리가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큰 나무들 그 다음 중간에는 아이 키만한 크기의 관목들, 회양목과 철쭉들이 조경용으로 갖다 놓은 큰 바위들 틈으로 자라고 있었다. 특히 회양목은 동글동글하고 작은 잎이 많이 달려 있어 소꿉놀이할 때 뜯어 쓰기가 좋았다. 통로를 가운데 두고 그 맞은 편에 벽돌로 경계를 지어 놓은 할머니의 화단에는 수국과 맨드라미, 해바라기와 붓꽃 나무 같이 키 큰 꽃들이 심겨 있었다. 할머니나 삼촌은 늘 초저녁 즈음 마당으로 나와 한여름 열기에 지친 꽃과 나무에게 마당의 호스를 틀어 물을 뿌려주었다. 동네 아이들과 놀다 들어오면 대문 초입부터 물을 가득 머금은 흙냄새와 화초 냄새가 내 콧속으로 그득하게 차올랐다. 나는 그 냄새에 홀린 듯 꽃나무 앞에 앉아 가만히 그것들을 보았다. 꽃잎과 그 안에 든 얇디얇은 암술과 수술에도 물방울이 매달려 있는 모습은 어린 눈에도 충분히 신비롭고 예뻤다. 때때로 물이 뿌려진 마당에는 돌 블록 틈 사이로 지렁이들이 나왔다. 아무래도 비가 왔다고 착각하고 숨을 쉬기 위해 나온 듯했다. 바깥으로 나온 지렁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 허옇게 배를 뒤집었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 까맣게 쪼그라들었다. 그러면 그것들 주위로 새까만 개미떼가 몰려와 자기 몸의 수십 배가 되는 지렁이를 등에 얹어 자기네들 굴로 데려갔다.


나는 술 먹는 엄마, 술에 취하면 1-2주는 사라져 버리는, 딸은 물론이고 본인을 챙길 여력이 없는 엄마를 두었어도 할머니의 보호 아래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혼자서 대문 밖을 나간 적이 없다. 또래 친구 역시 유치원과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 다였다. 어느 날 엄마 손을 잡고 간 시장에서 문방구 앞 게임기에 앉아 엄마가 준 백 원짜리를 넣고 장애물을 피하는 비행기 게임을 하는데 어떤 아이가 내 옆으로 앉더니 나를 갑자기 밀쳤다. 나는 그대로 옆으로 나가떨어졌고 내가 넣은 백 원으로 그 아이가 게임을 했다. 내가 그 애에게 따지거나 싸운 기억은 없다. 그저 게임을 하던 아이를 멍하니 쳐다본 기억이 다다. 엄마가 그 아이를 혼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날 저녁에 할머니와 엄마가 나눈 대화. "엄마, 우리 민주 밖에도 내보내고 해야 할 것 같아. 오늘도 지보다 덩치도 작고 딱 봐도 어린데 밀치니까 그냥 넘어가더라니까. 순딩이야 순딩이. 어쩜 좋아." 실제로 나는 나이에 비해 눈치도 빨랐고 순한 것과는 거리가 꽤 멀었는데 그날 엄마에게서 나온 그 ‘순딩이’라는 단어가 내 몸과 마음에 착 붙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꽤 오랫동안 나는 엄마와 다른 어른들에게 언제나 순한 아이가 되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으로 행동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


시장 게임기 사건 이후 엄마는 나에게 특훈을 시작했다. "누가 널 밀면 너도 밀어. 자 해봐." 쭈그려 앉아 내게 눈을 맞췄을지라도 곱절이나 크고 무거운 엄마를 밀쳐 넘어뜨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밀쳐서 엄마를 넘어뜨릴 때까지 엄마는 "더 세게 민주야. 이렇게 확."이라는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는 작은 손에 내 온 무게를 실어 겨우 엄마를 넘어뜨렸다. "그래 그렇지 이거야. 앞으로 나가서도. 동네 애들에게도 이렇게 해." 하지만 동네에 나가서 어쩌다 아이들과 다툼이 있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내가 밀쳐서 넘어뜨릴 수 있는 사람은 쭈그려 앉아 내게 어깨를 내어주는 엄마가 유일했다.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과 꽤 친하게 지냈다. 알콜중독이 심해지기 전,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얘기지만 그 때까지 사람들과 곧잘 어울렸다. 주로 더운 여름밤에 아줌마들은 저녁밥을 차리고 설거지까지 마무리한 뒤 여덟 시쯤 동네 어귀에 나왔다다. 누군가 챙겨 온 푸석푸석 소리가 나는 은박 돗자리에 앉아 채소를 같이 다듬거나 그것도 아니면 둘러 앉아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아직도 내가 엄마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스치는 단어는 호탕함인데 엄마의 호탕함은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극대화되었다. 엄마에게는 남들이 목젖에만 걸쳐 놓은 말들을 내뱉는 무모함과 대담함이 있었다. 대화 중 엄마가 그런 무모함과 대담함을 발휘할 때면 꼭 아줌마들은 자기 옆에 앉은 사람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치며 웃어댔다.


그날도 어김없이 동네에 모여 앉아 있는데 저 멀리서 젊은 남녀가 보였다. "동네에 이사 온 신혼부부가 있다는데 저들인가 봐." "어디. 저기 키 큰 남자랑 조그만 여자?" "맨날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만 보다가 저런 사람들 보니까 설렌다 설레." "아니 자기가 설레긴 왜 설레." 남녀가 걸어와 점점 가까워지자 아줌마들은 인사를 받을 요량인지 그들에게 맹목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고 더욱더 노골적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시선을 의식한 여자가 우리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이번 주에 이사왔어요. 초록 대문집 일층이에요." "아이고 새댁이네 새댁. 결혼은 언제 한거야? 진경이네 세든 거 맞지?" "동네에 이렇게 젊고 예쁜 새댁 보니 내가 다 기분이 좋네. 그나저나 신랑이 무지 키가 크네. 애 낳으면 애들이 다 모델해도 되겠어." 뽀얗고 머리가 긴 아직 앳돼 보이는 그 여자를 두고서 동네에 먼저 이사 온 여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아이고 신랑이 저렇게 크고 새댁이 작으면 밤 공부는 둘이 서로 어떻게 하실까 몰라.” 엄마가 말을 하자마자 아줌마들은 “아유 언니는 진짜” 하며 깔깔거리며 또 옆에 앉은 사람의 허벅지를 마구 때려댔다. 그때 내가 여덟살 쯤 되었으니 그 말에 가깝게 가닿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뉘앙스를 아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밤 아홉 시쯤 “엄마~ 아빠가 오래” “엄마, 아빠가 왜 안오냐는데”라는 말들을 나르는 아이들이 나오면 아줌마들은 벌게진 허벅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나이가 들수록 그 밤공부라는 것의 의미가 좀더 선명해지면서, 신혼부부를 앞에 두고 무례하고 야릇한 이야기를 호탕하고 당당하게 할 줄 아는 것은 아마 그 동네에 엄마뿐일 거란 생각을 했다. 이러나 저러나 엄마는 어디에서나 주목을 받는 사람이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재치있는 말솜씨로 이야기를 주도하며 관심을 받았고 취했을 때는 정신을 잃고 길거리나 가게에 쓰러져 있어서 주목을 받는 여자였다. 구십년대 초중반이었으니 그때만 하더라도 여자가 혼자 술을 먹는다는 것, 게다가 정신을 잃을 만큼 먹는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그런 엄마를 두고 말했다. “민주야 그걸 팔자가 세다고 한다. 네 어미 팔자가 아무리 봐도 드세고 센 것 같아서 내가 무당에 갖다 준 돈만 해도 돈천이다 돈천. 아무리 굿을 하고 빌고 빌어도 네 어미 팔자가 안 고쳐지대.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네 어미가 그렇게 내가 다니지 말라는 것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어려서부터 지 멋대로였어. 그 팔자가 너한테 갈까봐 걱정이다 할미는. 하지만 보아하니 너가 그렇게 네 어미 팔자를 이을 것 같진 않아. 무당도 그랬어. 네 어미가 낳은 딸은 다르게 살 것이라고. 나는 다 안 믿어도 그 말은 믿는다. 그니까 민주야 공부 열심히 하고 네 어미가 저 모양이어도 네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알았지?”


동네에서 아줌마들이 모여 한참을 떠들다가도 어둑어둑해지면 아줌마들은 모두 바닥에 두었던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아유 우리 아저씨 올 시간이야, 요즘은 오면 밥부터 찾아. 뭐 밥은 맡겨뒀나.””그래도 그 집 아저씨는 주는 대로 잘 먹잖아. 우리는 맨날 탕이네 국이네 거려. 제대로 된 거 끓이게 돈이라도 많이 주면 몰라. 쥐꼬리만 한 월급에 찾을 건 되게 찾아요.” 아줌마들의 푸념을 듣던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다들 밥 챙길 남편님 있어서 좋겠다 니들은. 남편 없는 여자는 서러워 살겠나.” 그런 말을 하는 엄마는 어딘가 자유로워 보였다.


동네 아줌마들보다 유복한 친정을 가졌어도 너무나도 분명한 엄마의 결여. 본인에게 남편이 없는 것보다 내 아이에게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엄마는 가장 견디기 어려워했다. “민주야 어디서 아빠 어디 갔냐 물으면 미국 갔다고 해. 그런데 자꾸만 더 물어보면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세요, 라고 말하면 되 너는. 알았니? 그리고 너한테 그런 거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꼭 엄마한테 말해야 된다.” 실제로 동네 아줌마들은 엄마가 취해 있을 때면 내게로 와 이런 것들을 물었다. “민주야 너는 아빠가 어디 있니? 아빠 본 적 있니?” ”우리 아빠는 미국에 있대요. 언제 올 진 모르고요.” “언제 떠났는데?” ”엄마가 그랬는데 더 궁금하면 우리 엄마한테 직접 물어보래요.” 우리 엄마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아줌마들은 끙하고 꼬리를 내리고 물러갔다. 하지만 나는 누가 내게 아빠에 관해서 물었다는 이야기를 할머니나 엄마에게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내가 초등학교 1-2학년 때까지 기억 속에는 엄마의 취한 모습이 거의 없다. 엄마가 술을 먹지 않아서는 아니고 그때는 먹더라도 바깥에서 먹었다. 한달에 1-2주 동안 사라지는 엄마. 그러면 나는 연락도 닿지 않는 엄마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 보고싶어 했다가 그리워했다가 미워했다. 그러다 내가 엄마를 미워해서 엄마가 일찍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 얼른 다른 마음을 먹었다. 엄마가 내게 외우라고 준 종이. 영어 가사를 한글로 적어놓은 종이를 보고 노래를 부르며 엄마를 기다렸다. '데 워졀 파머 헤더 독 앤 빙고 워 씨스 네임 오, 비 아이 엔지오, 비 아이 엔지오, 비 아이 엔지오 엔 빙고 워씨스 네임 오.'


할아버지가 죽고 나서 엄마는 집에서도 술을 먹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엄마가 술을 찾을 때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제발 동네 창피하니까 집에 있어라 내가 사 올 테니까. 네 아빠 죽을 때 네 아빠 관 속에 술 안 먹겠다고 다시는 안 먹겠다고 가슴팍에 편지를 열 장이나 올려놓고서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어." 이렇게 퍼붓고 금세 나가서 딸에게 줄 소주를 까만 봉지에 넣어 왔다.


술에 취한 엄마는 아빠 이야기를 많이 했다. "네 애비. 그건 사람도 아니지. 이렇게 버젓이 자식이 있는데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양육비 한번을 대주지 않고. 네 초등학교 갈 때는 그래도 연락이라도 올 줄 알았어. 옷 사 입히라고 돈이라도 보낼 줄 알았어. 하긴 그런 걸 할 줄 아는 인간이었으면 나한테 안 그랬겠지. 그 집안이 그래 그 집안이 전부 다. 시아버지는 시어머니가 바람 펴서 약 먹고 자살하고. 다섯 형제 중 장남인 네 아빠는 배운 게 있었겠니 그걸 보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그냥 하루 먹고 하루 살이한 거야. 그러다 날 만난 거고. 그래도 민주야. 엄마는 네가 있어서 행복해. 그래도 엄마는."


엄마가 아빠를 저주할 때면 아빠처럼 엄마를 슬프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엄마를 아프게 한 사람들을 벌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불안했다. 나는 그 사람의 딸이었으니까. 생전 본 적이 없어도 나는 아빠의 딸이었다. 지금 말로 말하면 내 아빠는 ‘배드 파더스’*였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나쁜 아빠.  그렇게 엄마가 말하는 아빠, 엄마를 때리기도 하고 돈을 요구하고 돈을 주면 바로 가서 도박으로 날려버리는 그를 나는 마음껏 미워할 수 있었다. 아빠와 나는 어떤 정서적 교류를 가진 적도 깊은 만남을 가진 적도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일에는 큰 에너지가 들지 않았다. 그저 미워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칠년 전 아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고모로부터 들었을 때, 그로 인해 아빠의 상속문제로 인해 재산을 조회하고, 그의 혼인증명서를 보았을 때, 그의 시체검안서를 보았을 때. 더이상 나는 그를 미워하지도 미워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서류상 그는 엄마와 헤어진 뒤 여러 여자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그중 두 여자와는 혼인신고를 했지만 일 년이 되지 않아 혼인신고 취소를 두 번이나 했다. 그 뒤로는 중국 국적의 여자를 만나 사실혼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본 의사가 작성한 시체검안서에는 그가 죽은 이유가 ‘불상’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사망원인이 병사인지 외인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말이었고 고모 말에 의하면 집에서 혼자 머물다 사망한 지 얼마 지난 후에 발견되었다고 했다. "민주야 아빠가 술을 좀 좋아하셨어. 술을 드시다 그렇게 되신 것 같아." 아빠는 여러 운수 회사를 옮기며 법인 택시를 몰았는데 죽기 몇 개월 전 카드론으로 진 빚 삼백만 원이 있는 걸로 봐선 생활고에 시달렸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돈을 벌 꾸준함이나 성실함과는 거리가 먼. 한 사람을 만나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기에 그는 이 사회가 정한 틀에 들어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면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비가 왔다. 나는 거실의 큰 창으로 마당의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제저녁에 금붕어를 묻은 자리를 보았다. 일층 거실에는 이미터 정도의 어항이 있었는데 일 년에 한두 번꼴로 심심치 않게 붕어들이 죽었다. 먹이를 많이 먹거나 동족에게 공격을 당한 붕어는 얼마 가지 않아 배를 하늘로 향한 채 수면 위를 떠다녔다. 그럴 때면 나는 위층에 사는 작은 언니와 함께 어항 구석에 세워진 뜰채를 가지고 금붕어를 건졌다. 붕어를 데려다가 화단의 흙을 파고 묻은 후 나무젓가락으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그곳에 꽂아두었다. 그렇게 붕어를 묻은 다음날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땅에 묻은 금붕어 생각에 온종일 거실 창가를 떠나지 못했다. 그때였다. 손바닥만 한 쥐가 정확히 붕어가 묻힌 흙을 파더니 아직 빛나는 주황색 지느러미를 가진 금붕어를 가뿐하게 든 후 두 다리로 땅을 지탱한 후 앞다리를 이용해 붕어의 배를 파먹기 시작했다. 네 발 달린 짐승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사람처럼 다리로 땅을 짚은 채 손을 이용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할머니나 엄마를 부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창문을 쿵쿵 쳤으나 내가 자신에게 오지 못할 것을 알았는지 유유히 식사를 했다. 그러다가 내가 창문을 열고서 소리를 지르고 뭐라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하자 그제서야 쥐는 금붕어를 내팽겨 치고 빠른 몸짓으로 사라져 버렸다. 살아있을 때 양옆으로 빵빵하게 불러있던 그 배가 파먹힌 채 뻥 뚫려 있던 금붕어. 그날 나는 할머니에게 안겨서 한참을 울었다.


그 집에 살면서 무수히 마주친 것들. 치자나무에 둥지를 짓고 알을 낳았다가 돌아오지 않는 어미 새를 기다리다가 말라비틀어진 알들. 비가 온 다음 날이면 흙에서 안간힘을 쓰며 숨을 쉬러 나왔다가 햇볕에 탄 채 까맣게 변한 지렁이들. 실험을 한답시고 내가 식용유를 개미굴에 쏟는 바람에 굴 입구를 둥둥 떠다니던 허연 애벌레와 까만 개미들의 사체. 초겨울 감나무에 남겨진 홍시를 먹으러 몰려들었던 까치들. 마당에 핀 사루비아 꽃을 따서 꽁지에 입을 대고 꿀을 쪽 빨아먹다가 내 코로 옮겨온 개미 두 마리.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헐거워진 창틀과 방충망. 술 먹는 엄마에게 술을 사다 나르던 할머니의 한숨. 마당에 물을 줄 때 그 호스의 물이 창문을 향할 때 마치 천둥이 치는 것과 같은 소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지금은 허연 타일을 붙인 빌라가 들어선 곳에 분명히 있던 집. 그 집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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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드파더스'는 이혼으로 인해 배우자에게 양육비와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전을 미지급한 사람들의 신상을 공개하여 ‘사적제재’를 가하는, 개인이 만든 사이트다. 그 이후 양육비를 미지급하는 아빠들을 ‘배드파더스’라 부른다.(물론 양육비를 미지급하는 배드마더스도 존재한다. 그 비율은 약 10%) 그때나 지금이나 아동의 인권 침해인 양육비 미지급의 영역에는 공권력이 부재하고 그 부재를 개인이 채우려 하고 있다. 다만 2021년 ‘양육비이행법’에 신설된 조항으로 인해 양육비를 미지급하는 사람에 대해 형사처벌까지의 범위를 넓히려고 하고 있으며, 이는 아직 국회에 계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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