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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Aug 25. 2022

근황

별 것 아닌 일을 씁니다



1. 내 불안은 나의 몫으로.


오늘 아이가 개학을 했다. 방학 때 쌓여온 리듬에 맞춰 느긋하게 준비하다가 창문 너머로 등교하는 아이들 보고선 아이를 재촉했다.


야 솔아 늦겠다, 다른 애들은 다 갔어 다.

아니 엄마 안 간 친구도 있을 거 아냐, 왜 나만 안 간 것처럼 그래. 나만 늦은 거야?

아 그렇지, 안 간 친구도 있지. 15분 ‘이나’ 남았으니까 우리 이제 나가면 되지.


늦을까봐 불안한 마음이 마치 아이가 잘못한 것 마냥 나만 쏙 빠지도록 책임을 전가하는 말로 나온다. 내 불안은 내가 처리하기. 어른이 돼도 이건 참 어렵다, 늘.


2. 십전대보탕, 하얀 스커트, 어떤 마음


어제는 눈이 아파 점심시간에 안과에 갔다. 진료를 마치고 김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무려 십전대보탕을 테이크아웃. 커피 냄새 솔솔 나는 카페에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들 사이로 “십전대보탕 주세요”


책장을 넘기면서 차를 마시다 입고 있던 하얀색 스커트 위에 짙은 갈색의  십전대보탕을 치마 위에     방울 흘렸다. 화장실에 가서 얼룩진 부위만 지운다는 것이 치마의 앞부분 전체를 적시자 심하게 얼룩덜룩했다. 우리  사무실과 화장실 청결을 책임져 주시는 여사님이  모습을 보더니 “아이고야 이게 뭐에요. 이거 써요.” 하시면서 휴게실로 들어가 드라이기를 꺼내오셨다. 보라색의 드라이기를 내밀면서, 그리고 벽에 있는 콘센트에 꽂힌 덮개를 손수 벗기시면서 “여기에 꽂아써요,  드라이기가 좋진 않은데 그래도 그러고 다니는 것보단 낫잖유.” 드라이기를 건네받아   말리니 금세 얼룩이 가장자리부터 옅어지더니 자국이 사라졌다.  그래도 사무실 에어컨 때문에 젖은 채로 일을 보기엔  찝찝했을텐데. 드라이기에 연결된 전기선을 꼼꼼히 정리했다. 작은 호의가 담긴 어떤 마음을 생각하며.



3. 황정은 작가


글쓰기란 과정이 없는 일 처럼 보인다. 결과물인 그 글만 남고 사실 그 글을 쓰기 위한 지난한 과정, 참고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고 인터뷰를 하고 과거의 시간을 복기하는 그 과정은 철저히 작가 그 개인만의 시간으로 흐르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소설가들의 브이로그가 나온다면 정말 엄청나게 긴 앉아있는 시간, 그들의 척추와 경추 골만 손목 손가락 모든 뼈들이 혹사 당하는 그런 시간들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쓰는 수필을 읽을 땐 비밀의 문을 여는 기분이 든다. 내가 읽은 이 이야기 너머에 있는 이 글을 쓴 사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일.


황정은 작가의 수필을 읽는다. 이렇게 많은 사회과학책을 읽을 줄은, 이렇게 많은 시간을 공부하며 보낼 줄은. 읽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쓰는 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쓰는 일이 두려워진다. 안다고 하고 사실은 반도, 아니 반의 반도 모르는 채 아는 것처럼 쓰는 일이.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만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방 방학도 맞이했겠다 글에 대한 고민은 조금 젖혀두면 좋을텐데. 고작 한 주 쉬는 글방 방학에 나는 왜 쓰는가 왜 써야 하는가 내가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 안에 든 과시와 허세와 인정에 대한 욕구와 갈망들을 들여다볼 땐, 아니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그것들이 스멀스멀 드러날 땐 심하게 부끄러워진다. 숨고 싶어진다. 한가하니 역시나 잡념이 몰아친다. 우르르. 쾅쾅.


4. 별 것 아닌 일.


별 것 아닌 일을 쓰는 일이 그동안 어려웠다. 내가 나의 글에 대해 바라고 요구하는 어떤 기준과 방향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여전히 크고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어떤 작은 것과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과소평가가 영향을 미쳤을테지. 실은 작은 것들, 내가 오늘 아침 마신 라떼의 꼬수움, 좋아하는 김밥을 3일 연속 먹는다는 만족감, 그간 머리 꽁꽁 싸매도 보이지 않았던 엑셀 수식 오류를 잡았다는 성취감, 그 오류를 잡을 때 도와준 동기에 대한 고마움, 날이 갈수록 풍부해지는 네 살된 둘째의 다채로운 표정, 여덟살이 되어도 늘 엄마품을 필요로 하는 첫째의 애틋한 욕구.


실은 이런 것들이 크지 않지만 내게 더 확실하고 실패할 확률 거의 없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인데. 늘 말부터 먼저 글부터 먼저 내뱉고 보는 나는, 시간이 없지만 앞으로는 일상을 보통 생각을 평범한 마음을 좀더 자주 쓰기로 해본다. 늘 각 잡고 허리 꼿꼿하게 세워 배에 힘주고 쓰는 글도 좋지만 이렇게 물 흐르듯 나오는 글도 내게는 유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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