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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Oct 11. 2024

빨간 크레파스

이영숙 죽어라

이영숙 죽어라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제 첫 글쓰기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저는 엄마랑 심하게 다퉜어요. 이유는 생각이 안 나요. 열 살 딸과 마흔둘의 엄마. 승자는 엄마였죠. 분을 이기지 못한 저는 씩씩거리며 뒷채로 혼자 건너왔습니다. 뒷채는 엄마와 제가 살던 곳인데 엄마가 자주 집을 비워서 저는 할머니가 있는 1층에서 주로 지냈어요. 덕분에 뒷채는 살림살이가 그대로 남은 채 빈집이 되었고 제겐 좋은 아지트였습니다. 뒷채를 지나쳐 창고로 들어가 의자를 하나 꺼내왔죠. 의자를 부엌과 연결된 작은 직사각형 창 앞에 두고 창문을 열고 창틀을 짚었습니다. 한 발씩 창틀 위에 올려놓고선 투둑. 물기가 말라서 허연 물 때 얼룩이 희미하게 진 싱크대 개수대 안에 두 발이 착지하면 성공. 곧장 안방으로 갔어요. 엄마와 내가 맨살을 맞대며 자던 침대의 맞은 편에 있는 큰 원목책상으로 가서 다이어리를 폈죠. 서랍 두 번째 칸을 열고 빨간색 크레파스를 꺼냈어요. 종이와 닿은 크레파스의 심지가 부서져 빨간 조각들이 종이 위에 고슬고슬 별처럼 뿌려질 만큼 힘을 주어 썼습니다. 그리고 흐느껴서 울었어요. ‘죽어라 죽어라 이영숙 죽어라’ 를 읊조리면서요. 그때만큼은 진심이었습니다. 며칠 뒤 엄마는 다시 술을 입에 댔고 저는 아지트로 향했어요. 그리고 원목책상 앞에 섰을 때 저는 제 귀싸대기를 날리고 싶었어요.


이영숙 죽어라

이영숙 죽어라


새빨간 글씨가 튀어나올 듯 저를 노려보고 있었거든요. 이 글자를 쓰고서 다이어리를 닫지 않은 거죠. 엄마가 이번에 술을 먹은 건 이 메모를 봤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발가락부터 차올랐어요. 은혜도 모르는 것, 애비 없이 엄마가 힘들게 키웠건만 엄마 죽으라고 뻘건 크레파스로 저주를 퍼붓는 것. 제 안에는 저를 향한 저주의 말들이 공처럼 튀기기 시작했어요. 농구공이나 축구공 말고 작지만 밀도가 높은 내용물이 들어서 빠르게 튀기는 탱탱볼 같은 공이요. 제 안에서 어느새 저주가 된 그것은 제 몸의 그 어느 구멍으로도 나가지 못했어요. 작은 육체를 구석구석 휩쓸며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습니다.


팡. 팡.

튀기면서요. 


자꾸만 기어나와요. 목구멍에서요. 하고 싶은 말들이요. 25년 전 그 저주가 저를 휩쓴 탓일까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새어 나오는 주술에 걸린 게 분명해요.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라는 노란 개나리처럼 어여쁜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 파스텔톤으로 표현된 아프리카 평원의 노든이라는 코뿔소가 나오는 <긴긴밤>이라는 책을 KTX에서 읽을 때.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는 제목의 시집을 읽을 때. 그 책의 문장들이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저는 자꾸만 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들이 떠올라요. 집중할 수가 없어요. 


덕분에 제 책의 귀퉁이와 여백에는 흑연과 점토의 비중이 반반 섞인 HB의 연필심으로 쓴 글씨가 가득해요. 저는 주로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혹은 들고 나는 지하철이 몰고 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 벤치에 앉아서 혹은 망원역에서 나와 걷다가 연필을 들어요. 그런 메모들이 모이고 모여서 A4 네다섯장의 글이 됩니다.


살갗과 내장이 부패할 틈도 없이 그 전에 뜨거운 불길로 사라진 엄마지만 엄마는 저를 떠나지 않았어요.


저는 절 둘러싼 모든 문장에서 엄마를 읽어낼 수 있어요. 빨간 크레파스로 엄마를 죽으라고 했기에 엄마를 떠나지 못하는 주술이 제게 걸린 거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엄마가 낚시아저씨에게 맞는 것을 보았던 날. 엄마가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채로 아저씨와 껴안은 모습을 보았던 날. 가랑이 사이로 수북한 음모가 훤히 드러난 채 누군가의 집에서 취해 잠든 엄마를 보았던 날. 뒷통수에 찐득한 검붉은 피를 묻히고 휘청거리며 손가락으로 벽을 스치며 지나간 엄마가 남긴 핏자국을 보았던 날. 동네 아이들과 다투다 울음이 터진 나를 데리고 호프집에 데려가 아홉살 짜리 아이보다 더 불안한 눈빛으로 생맥주를 들이키던 엄마를 보았던 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맨솔 한 개피를 입으로 가져간 뒤 엄마의 입에서 뿜어진 허연 연기를 보았던 날.


맞아요.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그녀의 이야기 뿐.


트리거.


이게 다 트리거 때문이에요. 저주가 풀릴만 하면 다시금 제게 저주를 거는 것. Trigger. 서울역 주변 여자 노숙자. 술에 취한 사람들. 회현역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 맨발에 헐떡 거리는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 초행길인지 역 주변을 여기저기 두리번대며 미숙함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회사 점심 시간에 종종 마주쳐요. 그럼 저는 또 빨간 크레파스의 저주에 걸리죠. 오후에 사무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 잔상들에 저는 갇혀버려요. 그러면 또 필기와 미술용 중간 단계라는 너무 무르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은 HB 연필을 들고 A4용지에 써요. 그러다 누군가가 제 어깨를 툭 치며 말하죠. “또 쓰네. 손가락 안 아파?”  “잠깐. 업무 생각 좀 정리하려고요.”


거짓말이에요.


정리는 무슨.


쓸수록 더 복잡해지는 걸요.


저는 엄마에 대해 쓰고 있었어요.


제게 공간과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다리를 벌려 실을 잡고 탐폰을 질에서 끄집어 내면서 벌겋고 비린 기억 하나가 같이 딸려나왔어요. 생리가 시작된 날. 열세살이었던 내 손을 잡고 마트에 간 엄마가 고른 생리대. 4팩에 5천원짜리 보라색 불투명 포장지에 든 오버나이트 생리대를 들고 계산대로 갔던 엄마의 모습이요. 그저께는 회사 화장실 세번 째 칸 변기에 앉아서 계란 모양 타원형 변기 시트 형태가 엉덩이와 허벅지 주위에 시뻘겋게 자국이 남을 정도로 휴대폰 메모장에 옛날 기억을 썼어요. 그리고 좋아하는 것은 꽤 긴 에스컬레이터. 회현역과 삼각지역. 그곳의 출발점에 서면 끝날 때까지 한두 페이지를 읽을 수 있거든요. 그러면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마지막 에스컬레이터 한 칸 위에 서서는 할 말들이 차고 넘치게 돼요. 그리고 그건 제 글이 되고요. 나의 것이면서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닌 글이요.


아.


이걸 쓰는 중에 또 떠오르고 말았어요. 제가 엄마를 처음 때렸던 그 날. 새벽 1시. 밤이 늦었으나 집 앞 바로 있는 그 빌어먹을 주황색 가로등 때문에 집은 기괴하게 훤했어요. 엄마는 또 술을 먹으러 나간다고 했고 저는 엄마를 막았죠. 술에 취한 엄마를 힘껏 밀었는데 엄마의 뒷통수가 기둥 벽에 부딪히고 말았어요. 그 충격으로 엄마는 한동안 숨을 가쁘게 내쉬었어요. 제 몸 속을 순환하는 모든 액체들의 온도가 순식간에 낮아졌어요. 가랑이 사이까지 차가운 피가 도는 느낌. 다행히 엄마는 다시 일어나서 술을 사러가야 한다고 했고 저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대문을 열고 나갔어요. 집 안에 가득 들어찬 가로등 불빛과 나와 엄마 할머니가 만들어낸 까만 그림자들. 쉴새없이 싸우고 복닥거리고 밀치던 그림자 세 덩이.


수도관이 터진 수도꼭지.


그게 저 같아요.


수도관이 터졌으니까 내가 쓰고 싶을 때 쓸 수 없어요. 흘러나오는 대로 써요.


제가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할머니의 트라우마가 엄마에게 그리고그것이 제게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전쟁 중 돌쟁이 아이를 잃고 다 큰 스물 세살 짜리 아들을 잃은 할머니가 정상일리 없었겠죠. 할머니는 엄마를 어떻게 키웠으며 그 시대는 할머니의 유전자에 어떤 그을음을 남겼던걸까요. 엄마는 왜 저렇게 된거죠. 술을 먹는 여자. 그치만 딸을 낳은 여자. 그래도 살아보려고 했던 여자. 


쓰면 쓸수록 엄마를 재창조하는 것만 같아요. 나는 그녀를 안다고 할 수 있는지 제게 되물어요. 그러면 저는 놀라울 정도로 확신해요. 내가 아는 모습이 엄마의 다라구요. 거만해보이나요? 그런데 진짜에요. 나는 엄마를 깊숙히 알아요. 나는 엄마의 모든 것을 보았어요. 아니 엄마에 대해 모두 안다고 하는 편이 편할지도 몰라서 하는 말일까요. 누군가 제 글로 표현된 엄마를 보았을 때 입체적이라고 말했지만 제 안의 엄마는 고정적이에요. 늘 그 자리에 끈질기게 제게 달라붙어있는.


찰싹.


엄마가 저녁을 준비할 동안 저는 그 뒷채로 갔어요. 여느 때처럼 창틀로 튀어올랐구요. 그런데 창틀에 할머니가 방앗간에서 새로 짜온 참기름이 있었던 거에요. 망할. 저는 참기름병을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까만 갈색의 참기름이 담긴 청색병이 세로로 쪼개지며 기름이 온 사방에 튀었어요. 기름은 아주 천천히 낮은 곳을 따라 흐르면서 주위의 먼지와 흙을 품고서 하수구로 향했어요. 땅에 흐르는 기름 냄새가 너무 좋아서 배가 고파졌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땅에 흥건한 참기름에 손가락을 찍고 혀로 가져갔어요. 흙이 그대로 씹히고 꺼끌거렸지만 고소함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죠. 유리가루도 씹히는 듯 했어요. 저는 그걸 삼켰어요.


끌꺽.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덜 깬 채 할머니와 엄마가 하는 말을 들었어요. 민주 쟤가 참기름을 깨뜨렸단다. 도둑고양이 마냥 뒷채에 들락거리면서. 그게 얼마나 비싼건데. 할머니가 말하자 엄마가 대답했죠. 모른 척하자 엄마. 쟤도 숨구멍이 있어야지.  


엄마와 할머니가 방을 청소하는 방식. 두루마리 휴지를 한 손에 잔뜩 말아서 바닥을 쓴다. 먼지를 한데 모은 후 클라이막스. 먼지에 침을 떨어뜨린다. 뱉으면 먼지들이 사방으로 튀니까 떨어뜨린다. 그러면 뱉은 침 주위로 개미가 모여들 듯 먼지들이 달라붙어요. 걸쭉한 침이 꼭 구심력을 가진 것처럼 그 주위로 쫑끗. 그러면 손에 돌돌 만 휴지로 그것을 꾹꾹 눌러서 먼지를 모으죠. 저희 집 거실에서 저는 종종 침을 떨어뜨리고 싶은 욕구를 느껴요. 물티슈로 바닥을 닦다가 나도 모르게 아래 입술과 윗 입술을 벌리고 침덩이를 툭.


저는 말도 못하게 수치스러워요.


이런 더러운 방식으로.


침으로 바닥을 닦으려고 하는거야?


경멸하며 봤던 엄마의 입술과 걸쭉한 침.


사실 별게 없어요. 수도꼭지처럼 틀고서 쓰는 글도 아니에요. 그저 동파되어 터진 수도꼭지처럼 줄줄 새는 거죠. 벽을 타고 흐르는 물들. 담기지 않는 이야기.


그래서 쓰는 거죠.


줄줄.


망할 애비

취한 엄마

이영숙 죽어라

빨간 크레파스

주황색 가로등

피 묻은 시멘트 벽

고소한 참기름 냄새

오버나이트 생리대


그게 다일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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