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육아 어린이집 부모 교육을 다녀오며
아이는 공동육아어린이집에 다닌다. 일반 어린이집과 같이 어린이집은 ‘돌봄’을 제공하는 곳이지만 차이점이 꽤 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터전’이라고 부른다. 터전 안에서 선생님들은 별칭(ex.수수, 찰떡, 밤톨 등)을 사용하고, 아이들과 교사는 서로 ‘평어’를 사용한다. 이 뿐만 아니라 조합 형태이기 때문에 양육자들이 홍보, 재정, 운영 등의 조직을 운영하여 직접 어린이집을 운영한다. 등하원 때는 양육자가 직접 터전 안으로 들어와 아이의 짐을 챙기고 인사를 나눈다. 아이들과 '짬,짬,뽀!'라며 손뼉 두번, 뽀에 뽀뽀 쪽을 하는 인사는 할 때마다 늘 애틋하다. 나와 내 아이가 하는 인사를 보고 자기와도 짬짬뽀를 해달라고 오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것을 해주고 나온 날이면, 출근 길이 왠지 마음이 간질거린다. 아이들의 엄마 아빠를 ‘아마’라고 부르며 아마들과 아이들의 모임은 꽤나 잦은 편이다. 방금도 교육이 끝난 후 터전에 모여 지난 주에 있었던 마을 축제 평가회를 하고 왔다.
방금 들은 교육은 공동육아를 하는 부모들이 분기 별로 듣는데 거의 필수적인 교육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각 어린이집 별로 진행되었던 교육이 아이들 수가 줄어들면서 어린이집 규모도 줄어듦에 따라 통합으로 이뤄진다. 오늘은 마포구청의 강의실을 빌려 진행했다.
교육 주제는 ‘AI 시대에서의 공동육아, 교육 방향과 부모 역할’ 부제는 ‘오늘 여러분이 내딛는 한 걸음이 우리 아이들의 내일이 됩니다’ 였다. 교육 강사는 성공회대 교육대학원 교수 고병헌님.
교육 시간에 조금 늦어 들어갔더니 이미 강의실은 거의 백명 가량의 부모들로 채워져 있었다. 내용은 대강 이랬다.
아이의 행동은 늘 예측이 불가하다. 어느 날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아이에게 ‘그럴 수 있어’ 라고, 어느 날은 ‘너 진짜 계속 그럴래’ 라고. 양육자의 반응은 그 날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그러니까 아이는 늘 변화무쌍하고 예측이 불가한 상황은 같은데 그것을 보는 우리의 상태에 따라 다른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육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이를 위해 얼마나 애쓰느냐가 아니라, 아이에게 정성스럽고 정확한 반응을
해줄 수 있는 나의 상태라는 것이다.
한국의 양육자들은 자기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영혼까지 갈고 갈아 아이에게 퍼붓지만 결국 그것이 누구의 욕심이고 누구의 바람인가. 양육자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내 삶을 힘있고 생기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 삶에 고요함과 평온을 허락한다면 아이의 삶에도 조용히, 그런 고요와 평온이 허락될 것이라고.
나는 우리 아이에게 어떤 현실과 삶으로
경험되어지고 있는 양육자인가?
아이가 나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지, 나 처럼은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지.
상식도 통하지 않는 이런 말도 안되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게다가 가슴이 설레이는 삶을 살아가려면, 아이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본인에게 집중을 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결코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말도 안되는 비용을 지불하고 이 공동육아를 하고 있지 않냐… 라는 강의자의 말.
한국의 여러 모임은 다녀오고 나면 꼭 기분이 좋지 않고, 꼭 이렇게 살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교수님이 말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누군가의 삶을 평가한다. 지인의 연봉과 타는 차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이 되어달라고. 부모와 아이로 만났지만 비록, 그럼에도 각자가 지닌 그 운명을, 서로 각자 삶의 과제를 실현할 수 있도록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자고.
강의 주제에는 ‘AI’가 들어갔지만 그것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 역시 연일 화두는 'AI'다. 조직도 사업도 그것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연일 모든 곳에 마치 만능인냥 붙은 그 AI라는 단어가 이번 교육의 주제를 차지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시대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준비시키고 함께 배우며 새롭게 재편된 세상을 살아가야할 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에 인공지능이 들어가고, 인간을 대체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분야에 ‘윤리’라는 교육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AI와 비교하여 인간이 비교우위에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인공지능이 결코 따라할 수 없는
인간과의 정교한 ‘관계’,
그 속에서 파생되는 갈등과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지에 대해,
우리는 공동육아라는 안전한 공동체 속에서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유난히 기억에 남은 말.
이 정도 능력을 지닌 집단은 사회에서 많지만,
이 정도의 순수성을 지닌 집단은 절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공동 육아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내 아이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을 내 아이마냥 대하고 먹이고 기르는 곳이니까. 물론 내 아이가 좋은 정서적 자원을 쌓길 원하고 안전한 돌봄을 위해 ‘내 아이’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결국 그 관심과 사랑이 다른 이를 향하게 되는 곳. 나에게 꼭 이득이 되지 않더라도, 이해관계로 엮이지 않더라도 서로를 위해 시간과 품을 내어주는 곳. 나 역시 이곳에 와서 다른 양육자들의 모습을 통해 배우고, 갈등을 봉합해 나가는 것을 보며 채워진 마음의 빈 공간이 있으니까. 또한 실질적으로 받은 도움들. 퇴근이 늦은 날 아이를 대신 데려가 먹이고 돌봐주었던 기억들, 아이 문제로 고민이 될 때 선뜻 시간을 내어주고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었던 시선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우리에게 도전을 하나 하셨다. 바로 우리의 터전, 즉 우리의 공동육아가 우리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 과연 좋냐? 라는 것이다. 아니 내 아이 키우는 것도, 게다가 공동육아라는 공동체 속 일원으로 제 몫을 해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시선을 둔다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대책없는 낙관주의자라 그런 지 이러한 순수성을 지닌 이들과 함께라면 해볼만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비록 결과가 나의 때에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아도 언젠가는, 지금의 사람들이 공동체 속에서 고민을 하고 품을 내어주는 것이 다른 때에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길잡이가 되고 방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주제넘은 상상도 해보았다.
모든 과정은 완벽하다
라는 말로 강의는 끝이 났다. 사실 삶의 모든 시간이 과정이지 않나. 지금 모습 이대로의 아이와 나 자신을 인정하고 나와 함께 이 길을 걷는 이들, 공동체의 소중함을 알고 연대하려는 아이들과 아이를 기르고, 이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일 자체가 완벽한 과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공동육아라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입학시킨 것이지만, 부모 또한 입학한 것이라는 교수님의 말이 맴돈다. 아이 못지 않게 나 역시 우리어린이집, 이라는 공동육아라는 공간에서 배울 수 있는 만큼 느낄 수 있는 만큼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리리라, 다짐해본다. 다소 다짐에 허세가 가득한 듯 하여 부끄럽지만 다짐만이라도 이렇게 거창하게.
아래 사진은 지난 11.9 성미산 마을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