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

아름다운 문학과 힘있는 증언

by 한시영


나의 첫 책은 모녀 서사, 말 그대로 엄마와 딸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런 책을 잘 읽지 못했다. 아니 피했다는 게 맞겠다. 질투가 났으니까. 나는 갖지 못한 엄마를, 또한 가져보지 못한 딸의 위치를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으니까. 그래서 그 이야기들을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그치만 결국엔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가 바로 그 책이다. 모녀 구술생애사 책으로 세 딸이 담은 세 엄마, 세 여성의 이야기다. 나는 그토록 피하고 싶었다면서 홀린듯 이 책을 사서 읽어버렸다.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어떤 비명이 있다.


모녀 서사, 라고 하면 우리가 기대하듯이 딸이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해를 쌓아가고 엄마 역시 보듬어주지 못했던 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사과하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삶의 의문과 상처를 가득 안은 두 여성이 마주 앉아 여전히 부딪히고 그 때문에 체념하고 등을 돌려 외면하지만, 결국에는 끝내 다시 마주 보는 이야기이다.


베이비부머 시대에 태어난 여성들이 갖는 삶의 보편적 특징들은 생애주기가 갖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다. 한국사회가 거쳐온 경제적 부흥기, 산업 사회로의 진입, 민주화와 같은 굵직한 사회정치적 흐름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이들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했던 수많은 선택과 포기들은 때론 강요받은 것들이며, 때론 선택지 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내몰린 것들이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이들의 진술을 개인의 특성에서 바라볼 수 있게 조명하면서도 이들이 당시 서있던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짚어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엄마로 나온 최숙희, 우정아, 박경화를 한 고유한 여성으로 읽을 수 있었으며 동시에 195-60년대를 살아간 여성들로도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을 다 읽은 순간 나와 고작 두세 살 차이 나는 책의 작가들, 김소영 홍이란 박하람 이들의 이름이 적힌 책의 앞 표지 뒷면을 만지며 고생했다, 정말, 이라는 격려의 말이 터져나왔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 사회가 많은 빚을 졌으며 기억해야 할 여성들의 이야기를 이토록 잘 써내어준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구술을 마친 후 이들 모녀의 삶이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아온 대로 그렇게 또 자신의 생을 살아갈 것이다. 갑작스러운 화해나 변화를 이 책이 담고 있지는 않다. 진실은 개운함과 명료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지부진하고 지리멸렬한 것과 가깝지. 하지만 묵직하다. 그래서 진실을 마주한 이들은 그 전과는 분명 달라져있다. 이 책을 마주한 나 역시 이 전과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아름다운 문학 작품과 힘있는 증언은 멀리 있지 않다. 이토록 가까이에 있다.


이 책의 말미에 나온 정희진 작가의 >아주 친밀한 폭력<의 구절을 붙이며 마친다.(322p)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이 언어화될 때만이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다. 내 고통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인식만이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런 점에서 학문이란 무엇인가,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 외 책에서


69p.
“남성성의 형성은 여성의 복종과 배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성은 아이에게 젖을 주듯 남성에게 자아를 키워주고 그들의 상처와 분노를 어루만져주어야 한다. 이렇게 여성 이 남성을 만드는 과정이 감정 노동, 보살핌 노동이다. 여 성은 비난의 말, 자존심 상하게 하는 말, 무관심 등으로 남 성성을 거세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남성을 강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모든 책임 은 여성에게 있다.“(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마지막 문장에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오래된 말 이 떠오른다. 마치 여성에게 모든 권력이 있는 것처럼 들 리지만, 실제로는 권력자인 남성의 비위를 맞추기에 따라 여성 자신이 받을 대우가 정해진다는, 그리하여 남성의 가 해 역시 피해자인 여성의 책임으로 돌아오는 마법 같은 말이다.


322p.
가부장제는 여자아이에게 충분한 자원을 내어주지 않는다. 관심이 든 사랑이든 인정이든 존중이든 자유든 간에 말이다. 세계가 나를 향 해 기울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세계를 향해 몸을 낮춘다. 내가 원 하는 만큼 돌봄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내가 먼저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쓸모로 말미암아 나의 자리가 겨우 생겨난다. 어머 니에게 가장 돌봄을 받지 못한 딸이, 역설적으로 가장 어머니를 많이 돌보게 되는 이유다.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어도 아들은 예외다. 그들 은 자기 욕구에 몰두해도 괜찮은 존재로 키워진다. 가부장제는 여자 아이에게 인색한 만큼 남자아이에게 너그럽다. 태어날 때부터 아들 은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는다. 그리하여 가족 안에서 아들은 돌봄의 대상이 되고, 딸은 돌봄의 조력자가 된다.


319p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모르는 게 속 편하다는 것을. 무지는 특권이다. 이는 청자로서 아들을 호명하지 않는 어머니의 선택과 맞물린다. 듣는다는 것은 감정 노동 인 동시에 고도의 돌봄 행위다. 남성을 돌봄 주체로 규정하지 않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아들에게 이해 받기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