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방대한 세계를

격 없는 우정, 김현아

by 한시영

김현아 작가의 <격 없는 우정>을 읽었다.


작가가 만난 존재들이 이 책 안에 있다. 이 책 안에서 내게 말을 건넨다. 살아 숨쉬듯 미칠듯한 생명력을 가진 어마어마한 존재들이 책장을 넘어서 내게 온다.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과 외국인, 바다속에서 만난 멸치와 몽골 초원의 양까지. 작가가 그것들과 어떻게 교류하고 감응하며 글방이라는 세계를 짓고 여전히 그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 분투하고 읽고 쓰는지가 이 책 속에 있다.


김현아라는 작가 안에 깃든 수많은 영혼들과 조우하는 것만 같다. 그들과 만난 적도 이야기 나눈 적도 없으면서. 어느새 그들의 상실에 같이 아파하고 그들의 어려움에 같이 분개하고 명석함에는 뿌듯해하고 기쁨에는 하나가 된다.


좋은 글은 이런 것이다. 내가 발 딛고 선 땅이 어디인지잊게 만든 채 글 속의 이들과 하나가 되게 만드는 것. 이 책은 나를 몽골의 초원으로, 멸치떼가 지나는 바다 깊은 곳으로, 베트남전쟁의 생존자와의 식사 자리로 이끈다. 그것이 즐거워 나는 초대에 응한 채 이토록 생생한 읽기를 계속해나간다.


책 속의 시위에 나가 연행이 된 청소년과 벗을 지키고자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선생(김현아 작가)과 실갱이를 하는 부분(119p)에서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자신이 소중하다 믿는 것을 몸을 던져 구하고자 하는 사랑이 너무나 어색해서. 그것을 마주하는 것이 놀라워서. 하지만 그 어색함과 놀라움은 어느새 뜨거움으로 변했다. 그 사랑은 참으로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것이기때문에 내 마음은 금방 그것에 동하여 움직였다. 내 안에 분명히 정확하게 자리한 정의감, 연민, 측은지심, 연대의 마음들의 여전히 살아있음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확인한다.


그리고 그들이 고 백남기 농민의 빈소를 지키고, 12월 3일 그날의 광장을 지키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는 부분에서는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무모하지만 유연하고한없이 약하지만 대담한 그 청춘들에게 빚을 지었구나.그들을 바라봐주고 곁에 있어준 어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도 싶었다.


그 청년들이 가진 무모함과 유연함을, 한없이 약함과 담대함을 지킬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런 세계는 어떤 곳일까? 그런 세계를 찾지 말자, 내가 그려보자, 내가 생각해보자. 그들이 살고 싶어하는 그 세계를 나의 손과 발로 내 곁의 사람들과 만들어 나가자 다짐했다.


이렇게 좋은 글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직접적으로’ 촉구하지 않아도 매정하고도 아주 손쉽게 나를궁지로 내몬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어른이 되어 어떤 품을 내어주고 다시금 겸손하게 무엇 앞에 마음을 내어주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상상하게끔.


작가가 젊은 시절, 초등학생 어린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는 한반도의 분단과 광주의 이야기. 그 모습에 나는 왜 마음을 빼앗기고 생생하게 그려지는 그 장면에 멈춰 서는가.


옹기종기 좌식상을 가운데 두고 모여 앉았을 그와 어린학생들을 그려본다. 마음과 말이, 오갔을 그 공간이 꼭 내 눈 앞에 있는 듯 하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그 스승의 마음, 방문 너머 글쓰기 선생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부모의 마음, 선생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또랑또랑한 눈빛을 냈을 어린 아이의 마음. 그 여러가지의 마음이 되어본다. 지금은 사십대가 되었을 그들, 내가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이들을 떠올리는데 왜이렇게 마음이 시큰해진단 말인가.


이 책을 그저 들고 눈으로 읽어나갔을 뿐이지만 자꾸만작가가 나를 책 속으로 내몬다. 인정사정없이. 나는 어느새 이 책과 하나가 되어 이 책을 통해 나를 읽고 내가 사는 세계를 읽어낸다. 그리고 책 속의 사람들과 어느새 같은 시선과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본다.


이토록 방대하고 넓은 세계를 자신 안에 깃든 영혼들을불러내어, 만남들을 소환하여, 때로는 경의와 존중을 양껏 담고 때론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만의 언어로 써내려간 이야기가 있던가. 아득히 넓은 것은 어떤 어려운 말이나 현학적인 표현으로 해낼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세계를 보여주면 된다. 이 책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