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멀고도 가까운>
사라지는 것들을 앞에 둔 우리는 어떠한가. 사라질 것들 혹은 사라질,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을 앞에 둔 우리 말이다. 내게 영화 <멀고도 가까운>은 그런 것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간과 시간 안에 가두어 어떻게든 재현하려는 이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비디오 테이프, 카세트 테이프, 이미 방영이 끝난 라디오 프로그램, 어느날 스쳐 지나간 과거의 연인… 당신은 그것들 앞에 멈춰 서 본적이 있는가. 빠른 변화와 성장, 팽창과 과열을 거듭하는, 그것에 신음하는 도시 서울.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그런 도시 속에서 주인공 준호는 자신의 맥주집에서 이제는 그 어디서도 듣기 어려운 영화 라디오 방송의 녹음 테이프를 틀어놓는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것들, 옛날 LP, 비디오테이프, 카세트… 그것들이 가득 채운 맥주집이지만, 공교롭게도 사람들은 이곳을 스쳐 지난다. 연인과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고, 특별한 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그 순간의 행복감을 하나의 폴라로이드로 남긴 채 스쳐 지난다. 과거를 간직한 것들과 매번 새로이 스쳐지나가는 이들이 조우하는 곳이 그가 운영하는 맥주가게, '파인트'라는 공간이다.
맥주가게에 찾아온 경찰 역의 남성이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이 담긴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고 묻는다. “이 사람들, 잘 살고 있을까요? 사장님, 그거 궁금하지 않아요?”그러자 준호는 답한다. “잘 살겠죠. 여기서 즐거웠으면 됐죠.” 잊혀지는 것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안타까움을 가진 이가 하는 대답이라기엔 다소 냉정해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인연에 대한 그리움이고 허망함이었으며, 인연에 대한 깨달음이 담긴 말로 내게 찾아왔다.
끊임없이 위를 향해 오르고자 하는 상향 욕구를 지닌 인물 동석과 동수. 고 송재림 배우가 1인 2역으로 연기한 두 역은 요즘의 세대의 일부를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재개발과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탕에 성공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영민함과 교활함. 그게 뭐든 없어지든 말든 그것보다는 당장 나에게 그 사안이 도움되는지 되지 않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약삭빠름.
하지만 빠른 시류에 자신의 몸을 실은 동석과 동수에게서는 어떤 웃음과 여유가 보이지 않는다. 재개발이 되어 사는 집에서 쫓겨 나야 하는 은영, 곧 자신의 트라우마로 자신이 운영하는 맥주가게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는 준호가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며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웃음을 보이며 서로 연결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석과 동수는 웃지 않는다. 그들이 웃음을 보일 때는 자조의 순간 뿐이다.
이 모든 영화의 흐름을 끌고 간 준호 역의 박호산 배우의 연기는 준호 그 자체였다. 공간과 시간을 자신의 것을 만드는 몸짓과 대사, 그거 내뱉는 한숨까지 하나가 되어 준호의 혼란스러움과 그 누구에게도 발화하지 못한 마음 속의 아련함을 표현해낸다. 1인 3역으로 준호의 죽은 옛 연인 수정과 환상 속 여인 연주, 친분 있는 손님 은영을 연기한 고은민 배우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했다. 다른 듯 묘하게 같으면서, 같지만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연기에 그가 표현한 세 여성에게 마음을 둔 채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사라질 것이다. 내게는 가까운 이 시간이 결국엔 먼 시간이 되어 사라진다. 오늘 마주친 이들은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지만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한 때 소중하게 가꾸었던 것들은 어느새 내게 잊혀질 것이고, 마음을 쏟아내며 연연했던 인연들은 나를 떠나갈 것이다. 내가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의지했던 말과 문장들도 결국 휘발될까. 아니면 내 감각에 흔적을 남겨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잊은 순간에도 내가 기억한 그 구절들을 읊조릴 수 있을까.
사라진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진 후 다가오는 것들을 떠올린다. “잘 살고 있겠죠. 그 순간만 행복했으면 됐죠.” 라는 준호의 대사가 다시금 떠오른다. 나를 스쳐간 모든 것들의 안녕을 빌며 그리워 하며, 멀고도 가까운 것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것들을 마주할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