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속 작가의 글쓰기
어린이집에 있는 첫 째를 데리러 가는 길, 버스가 달리는 그 길 위가 유일하게 마음 편히 책을 볼 수 있는 장소다. 버스에 올라타 자리를 잡고서 가방 속의 지갑을 꺼내 내릴 준비를 하기까지 네다섯 장 정도가 허락된다.
요즘 읽고 있는 김연수의 ‘시절일기’는 그만큼을 읽어도 마음에 뻐근함이 차오른다. 없는 시간 쪼개며, 책에 줄을 긋고 키보드를 꺼내 필사를 한다. 그중, 자신을 소설가로 만든 본인의 글쓰기에 대해 쓴 부분이 있다. 읽다 보니 그냥 좋아서, 그 글이 일러주는 대로 쓰면 더 잘 쓸 것 같아서, 두고두고 기억하려고 전체를 옮겨 썼다. 여기는 일부분만 발췌해 옮겨본다.
시절일기 중
가끔 어떻게 소설가가 됐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그 공책 이야기를 들려준다. 뭘 계속 쓰다 보니까 어느 날 소설가가 됐습니다, 라고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습작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때 나는 습작을 한 게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일기를 썼다. 최근에야 나는 그때 쓴 글들, 그니까 시처럼 행을 나눠가면서 쓴 글과 대화를 넣어 소설의 형식으로 쓴 글, 혹은 어떤 책을 읽고 쓴 감상문 등이 일상을 기록한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얼마 전에 출간된 <카프카의 일기> 덕분이었다.
(중략)
읽는 사람이 없을 것. 마음대로 쓸 것. 이 두 가지 지침 덕분에 일기 쓰기는 창의적 글쓰기에 가까워진다. 한 번이라도 발표를 목적으로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누군가 읽는다고 생각하면 한 글자도 쓰기가 싫어진다. 글쓰기가 괴로운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글쓰기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일기 쓰기를 권하고 싶다. 누구도 읽지 않을 테니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써라. 대신에 날마다 쓰고, 적어도 이십 분은 계속 써라 다 쓰고 나면 찢어버려도 좋다. 중요한 건 쓰는 행위 자체이지, 남기는 게 아니니까. 이것이 바로 <일기,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에 나오는 일기 쓰기 지침이다.
이렇게 하면 글을 자주 쓰게 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주 쓰면 많이 쓸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잘 쓰게 된다. 그런데 일기쓰기의 이 두 가지 지침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일기의 목적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이 글쓰기 과정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것은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 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말처럼, 자기 이해다. (* 여기까지)
결국 글쓰기는 타인과 이 세상에 닿는 행위인 것이다. 그치만 자기 이해도 벅찬 인간에게 나 이외의 존재를 이해할 능력은 애당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이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 것. 불가능한 일에 마음을 품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자 하는 그것이 좀 더 나은 글을 쓰게 하고, 나은 마음을 품게 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살게 하는 건지. 내가 하는 글쓰기에 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