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훔치고 싶던, 내가 탐냈던 문장들
하루종일 집에서 아이만 돌보다 마음이 삭막해질 때면 문장들을 옮겨놓은 필사노트를 꺼낸다. 한 문장 한 문장, 그렇게 한 사람의 고뇌가 깊숙이 담긴 글씨들로 눈을 적신다. 내 청춘의 문장들을 그렇게 손으로 쓰고 눈으로 담아본다. 그러면 그 글처럼 살아질 것 같고, 글을 쓴 작가처럼 살아낼 것 같아서 잠시나마 희망에 부푼다.
“주여,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도 푸르릅니다.” (깊은 강, 엔도 슈사쿠)
인간사는 이토록 비극인데, 저 넓은 바다는 여전히 고요하고 깊고 푸르다는 그 대비에 마음을 쓸어내린다. 세상이란, 삶이란,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 그 모순들을 이 한 문장이 담고 있다. 이 구절을 들을 때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 있었고, 매가 공중 위로 날아다니는 그 나가사키 바다를 바라보았다. 슈사쿠의 말이 단순히 눈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다. 나가사키 바다의 모습과 그 냄새와 파도 소리와 함께 내 몸으로 들어왔다. 잊을 수가 없다.
“어른의 삶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위한 선물입니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김민식)
한없는 위로가 된 문장. 알려주는 사람과 여력이 없고, 여유가 없어서, 무엇보다 어렸기에 읽지 못했던 책들과 영화와 음악, 경험을 탐내게 만들었다. 본래 있던 내 마음을 발견하게 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김연수 소설 제목)
이렇게 낭만적인 소설 제목이라니.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운명, 거부할 수 없는 그런 일.
“서울과 달리 제주도는 여름과 가을 사이의 맑은 날이 계속 이어졌다. 구름의 모양은 바람에 따라, 바다의 빛은 햇살의 각도에 따라 순간순간 바뀌어갔다.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쓸데없다고 핀잔준다 해도 내 쓸모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걸 어떡하나.”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순간순간 사라지는 그 ‘순간’들에 대한 기록. 여름과 가을 사이, 구름의 모양, 바다의 빛들처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함이 담겨있다. 그 마음을 활자로 옮기는 그 일을 이 작가가 사랑한다. 나 역시 사랑한다.
“퇴근한 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써내려갔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평범하게 사실을 나열한 이 문장 하나로 여러 생각에 잠긴다. 11시부터 2시, 밤과 새벽의 사이가 주는 고요함과 적막함. 피곤한 몸으로 타이핑하는 모습,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목, 써내려 갈 수밖에 없는, 쓰지 않으면 터져버릴지도 모르는 그 작가의 마음이 이 새벽 그를 노트북 앞으로 이끌었으리라. 무엇이 작가를 쓰게 했을까. 쓰지 않고는 잠자지 못하게 했을까 생각했다.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나의 청춘에 대해 떠올린다. 들고양이 같아도 그림자만큼은 아주 길게 드리우는 그 고양이 녀석. 문득 가슴이 쉽게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너무 자주 붉어졌던 내 청춘을 떠올린다. 나, 청춘, 끝난걸까. 내 생애 청춘은 이제 없을까.
늙음, 그 존재의 무너짐을 삶의 과제로 의연히 받아들이고 싶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늙음을 단순히 나이가 드는 것이 아닌 ‘존재의 무너짐’으로 표현하는 작가. 늙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늙음이 나와 다른 이의 인생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 끝에 나온 표현이겠지.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삶에 대한 치열한 직면, 그와 동시에 연민 없이 이런 표현이 나올 수 있을까 싶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을 하고 자신이 왜 상처 받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하잖아요. 아프니까. 그래서 희망은 항상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요. 진짜예요.(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거짓말. 희망은 힘과 돈과 권력에 있는 거지. 그래야 세상도 바꾸는 게 아니겠어?’라는 생각 뒤에 찾아오는 깨달음. 아, 아파보고 상처 받고 차별받아 봐야 이 세상을 바꿀 생각이 들겠구나. 상처 받지 않고 차별받지 않아 보면 굳이 세상을 바꿀 희망이 자리 잡을 마음의 자리가 있을까. 갖지 못해 차별받고 특권 대우받지 못한 것에 속상해하지말자.
“단지 이렇게 생각하니 아내가 그토록 그를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며 살았던가 싶어, 가슴이 꽉 조여 오는 기분이다.” (깊은 강, 엔도 슈사쿠)
가슴이 꽉 조여 오는 기분에 덩달아 내 가슴도 조여온다. 활자의 힘이란.
“소명이란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것이다.” (비크너)
‘그래도 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이 엄마, 한 남편의 아내, 직장인 말고 내게 허락된 소명 하나 있지 않을까?’라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게 만든 문장이다. 사치스러우면 어때, 생각인데. 사치부리며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