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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Apr 29. 2019

아이의 불안을 받아내며, 나는 그렇게 자란다.

내가 어른에게 그렇게 듣고 싶었던 그 말, 그 말을 네게 한다.

어린이집에서 속상했던 일을 아이가 내게 말한다. 속상하고, 슬펐다고. 그리 심각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부모로서 어느정도 개입을 해야겠단 판단이 드는 이야기였다.

“솔이야, 이야기해줘서 정말 고마워. 엄마한테 말하기 어려웠을텐데. 엄마는 너의 편이야. 널 지켜줄거고, 속상한 마음이 풀어질 수 있게 도와줄거야. 엄마가 선생님이랑 이야기 잘 해볼게, 다음부터도 이런 마음이 들 때는 엄마에게 말해줘.”

이 말을 하는데 왜 마음이 울컥한지, 아이 앞에서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고, 떨리는 목소리를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아이를 재우고 거실로 나와 생각해보니 내가 아이에게 했던 그 말, 실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다. 어린 너를 지켜준다는 말, 네가 어려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엄마가 도와준다는, 엄마는 너의 편이라는 말. 불안한 날 안정시키는 ‘어른의 말’.

널 보면 사람은 흙에서 온 존재가 맞구나 싶다. 흙, 돌, 식물 바라기


모든 부모가 완벽할 수 없듯 나의 부모도 그랬다. 불안처리가 잘 되지 않았던 나의 엄마는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더 불안해했다. 어린 내게 엄마의 불안은 고스란히 전해졌고, 그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다. 선생님, 친구, 학업 등의 문제를 혼자 안고서. 풀어내는 과정 중 자립심, 독립심이 자리잡은 건 사실이지만 어렸던 아이에게, 미성년이었던 학생에게 그 시간들이 결코 좋았을리만은 없다.

어느 오후. 대광고에서.


그랬던 내가 나의 아이에게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아이의 불안을 받아낸다. 실은 나도 그 이야길 듣고 속이 상하고 떨렸지만 나의 불안은 잠시 접어두고 아이에게 집중했다. 이 사실이 내겐 너무나도 크게 다가온다.

내가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과 안정감을 (그것이 부족할지라도) 내 아이에게 주면서 나는 회복하고 있다. 그 회복을 통해 나의 내면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울퉁불퉁했던 마음의 표면이 매끄러워지고 그 자리엔 다른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자리가 또 하나 생기고 있다. 그렇게 내 아이는 날 온전하게 만들어간다.

아이를 낳고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 두렵고 억울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런 깨달음이 찾아올 때면 엄마로서의 역할과 위치에 한없이 감사하다.

늘 그렇듯 누리는 혜택보다는 상실에 민감한 것이 사람이기에 엄마로서의 상실에 집중하고, 반응하며 지내왔는데. 그래서 나의 아이는 너무 사랑스러워도 ‘나의 나됨’을 방해하는 존재기도 했는데. 엄마이기에, 부모이기에 누릴 수 있고 자랄 수 있고 치유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그것을 알고 아일 키우는 거와 모르는 거랑은 정말 큰 차이임을.

고맙다, 솔.


아빠랑 오삐들이랑 얼음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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