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교선 Feb 16. 2021

영혼의 무게

27살 취준생의 일상 수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이 났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오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다가 오기도 한다.

어느 때 건 반가운 것은 아니다. 어떻게 오든 죽음은 늘 산자의 몫이다.


 장례식은 돈이 많이 든다. 영정사진부터 수의까지 모든 것이 다 돈이다. 죽음의 금전적가치는 산 자들에 의해서 정해진다. 식장을 대여하고, 장례 절차를 따르고,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 역시 전부 돈이다. 영수증과 계약서에 적힌 그 많은 숫자들을 보면서 가난한 이는 죽음을 슬퍼할 방법조차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의 가치로 고인의 생전 가치가 정해지는 것일까. 그래서 부조금은 슬픔과 상실에 대한 위로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약속인 것이다. 위로의 말은 전하지 못해도, 돈은 꼭 보내는 것이 우리 시대의 죽음을 슬퍼하는 방법이 되었다.  


 코로나 시대의 장례식은 떠들썩하고 왁자지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장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음식은 최소한으로 준비되었고, 술조차 마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갔지만 채 20분을 넘기지 않고 다시 

돌아갔다. 기도소리나 찬송가 역시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침묵으로 슬퍼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했다. 

마스크는 예의를 넘어 필수가 되었고, 코로나는 죽음을 슬퍼하는 다른 장례문화를  바꾸도록 강요했다.


 입관식 날 나는 영정사진을 들고 앞서갔다. 관을 들어봐서 안다. 관은 장정 6은 달라붙어야 옮길 수 있다. 살아계실 때는 뼈와 가죽이 붙어 그렇게 마르고 그래서 그렇게 가볍던 고인이었다. 관과 함께 들어올린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영혼의 존재를 밝혀내려는 시도는 무수히 많았고, 누군가는 그 무게가 21g이라 주장한다.


 적어도 내가 느낀 무게는 21g보다 더 무거웠다. 내 두 손으로 직접 들어올리고, 피부결로 느껴졌던 그 관의

무게가 영혼의 무게가 아닐까. 딱딱하고, 무겁고, 차가운 관과 함께 들어올렸던 영혼의 무게.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사람들이 모두 함께하며 죽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다. 수십년 육신을 채운 채 시간이 아로새겨진 영혼이 결코 가벼울리 없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삶이 그리 가벼울리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