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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홍 May 10. 2018

여행, 떠난다고 좋기만 할쏘냐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여행의 현실에 대하여

 사실 우리는 직감적으로 압니다. 이 아름다움은 오직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만 허락된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러나 정말스럽게도 우리는 조용히 카메라를 꺼내 들어 아름다운 풍경을 게걸스럽게 찍기 시작합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가 아니라 '언제 그리고 어디서나'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지요.
- 발터 벤야민 <아우라> 中

 그렇다. 우리는 사실 알고 있다. 여행은 '지금 그리고 여기' 바로 그 순간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아니면 다시금 그 감동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또 알면서도 속는게 있다. 앨범 속 사진이 여행의 전부가 아님을.


 나는 여행에서 무엇을 기대한 걸까. 저녁 10시의 드라마가 주는 로맨스 판타지에 홀리듯 텔레비전이나 SNS에서 주는 여행의 단꿈에 취해있었나 보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이국적인 풍경 아래 포즈를 취한 아름다운 피사체 그리고 뭇사람들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해시태그들. (예를 들자면 #여행스타그램 #유럽 #행복 #YOLO 이런 것들 말이다) 중요한 건 이러한 게시물에선 낯선 땅에서의 어려움이나 여행의 후유증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매체에서도 이런건 안보여준다
 작년 이맘때쯤부터 유행한 YOLO 열풍 때문은 아니었다.

 유럽행 왕복 티켓이 생각보다 너무 싸게 나와서 이때가 아니면 언제 갈까 싶었다. 그래서 돈이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휴학 후 1년간의 계획을 모두 엎어놓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저질러놓고도 자꾸 떠올리고 곱씹어보는 타입이라 무작정 설레지만은 않았지만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많은 걸 느끼고 돌아오리라, 여행은 한 단계 나를 성장시켜주리라 믿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행 가서 단편소설 하나는 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실제로 내가 마주한 여행지에서의 현실은 다른 의미로 한국에서의 삶만큼이나 팍팍했다. 한국에서 가난한 대학생이었는데 여행지에 간다고 해서 갑자기 여유로워지는 건 아니었다. 항공권만 저렴하게 구매했뿐 숙박이나 식비 등은 적게 예산을 잡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행 내내 언제 예산이 떨어질까 불안했다. 와인과 현지 음식이 있는, 보통 우리가 떠올리는 유럽의 식당에 간 건 여행 중 손에 꼽는다.(그래서 지금도 뭐가 제일 맛있었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한다.. 먹은 게 없으니까..)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곳인데 전망대 티켓이 비싸서 올라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당연한 문제였지만 나는 그걸 간과했다.


가난한 여행자의 흔한 식사. jpg

 동행하는 사람과의 마찰도 무시할 수 없다. 사람 마음은 제각기 다른지라 장기간 여행을 하다 보면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한국이었더라면 화내고, 삐지고 토라지면 잠깐 얼굴 안 보면 되지만 여행지에서는 다르다. 죽일 듯이 싸워도 한 침대에서 자야 하고 뭐 이딴 인간이 있나 싶어도 붙어 다녀야 한다. 여행 가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다. 같이 갔던 언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린 평생 함께 살면서 단기간에 가장 많이 싸우는 기록을 세웠다. 이유도 가지가지다. 돈문제부터 시작해서 누가 먼저 짜증을 냈느냐, 관광지를 가느냐 마느냐, 사진을 왜 이렇게 찍냐 등등 유치해 보이지만 사람 다 똑같다. 우리도 감정소비가 싫어 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많은 대화를 나눴다. 현실은 달랐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예방하기 어렵고 힘든 건 여행지에서의 사고다. 여기서 사고란 현지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일들을 모두 포함한다. 인종차별, 교통사고, 소매치기 등등 많은 것들이 있지만 한 달 동안 내가 겪은 일들만 이야기해도 여행을 앞둔 이들에게 훌륭한 예시로 모자라지 않으리라.

 첫 사고는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발생했다.

 폴란드에 이어 두 번째 여행지였던 체코 프라하에서였다. 까를교 주변과 구시가지 광장을 돌아다니다 천문 시계탑에 올라 경치를 구경했다. 단언컨대 그동안 봐왔던 어느 경치보다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행을 위해 몇 개월 간 고생했던 시간들이 그 풍경을 본 순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난 지갑을 도둑맞았다. 자책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원체 꼼꼼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지갑을 잃어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먼 이국땅에서 도둑을 맞으니 충격이 컸다.  분실된 게 지갑이 아니라 여권이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니 더 끔찍했다. 이후로 난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지갑은 물론 여권도 숙소에 두고 다녔다.

지갑과 맞바꾼 프라하의 경치

 바로 다음 여행지인 부다페스트에선 노숙자가 시비를 걸어왔다. 프라하에서 막 부다페스트로 넘어온 날이었는데 날씨가 좋지 않았다. 비가 내리자 기차역으로 노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그중 한 명이 언니가 환전하러 간 사이에 나에게 다가왔다.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쳐다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노숙자는 자신의 코와 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무어라 해코지를 해댔다. 위험한 상황이라는 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았다. 손에 힘이 풀리고 다리가 떨려왔다. 노숙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눈을 최대한 내리깔았다. 그의 몸에서 나던 역한 냄새에도 얼굴이 찡그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곧 갔다.

노숙자 마주치기 5분전
 그렇지만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은 따로 있었다.

 그 일은 마지막 여행지이자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일어났다. 개선문 앞에서 전망대를 가느냐 마느냐로 언니와 작은 실랑이를 벌이던 도중이었다. 나와 언니는 개선문을 등지고 벤치에 앉아있었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우리와 20m 정도 거리를 두고 개선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혼자 온 여행객이려니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언니와 내가 옆 벤치로 자리를 옮기자 슬금슬금 따라왔고 내가 몸을 돌리면 그도 나와 마주 보는 방향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엇보다 개선문이 유명한 관광지이긴 하나 그토록 오랫동안 보고 서있다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제대로 쳐다본 순간 웃는 얼굴로 커다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불룩해진 아랫도리를 주무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선글라스는 여전히 나를 향해있는 채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언니가 안 봤으면 싶었다. 보자마자 언니 손을 잡고 일어나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치마를 입고 있던 내가 잘못한 걸까, 내가 오늘 바지를 입지 않아서?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다니 억울하고 화가 났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지 여행 도중 불쑥 그 모습이 떠오르긴 했지만 정신없는 일정에 오랫동안 생각에 빠질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그 남자를 꿈에서 또 마주했다. 가는 곳마다 그 남자가 등장해 나중엔 아예 도망을 다녔는데 결국 길에서 그 남자와 나만 남아 나는 계속 도망치고 있었다.

파리를 미워하진 않는다

 지금도 우리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이 일화에 대해 모른다. 이미 지난날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해서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특히나 가족들이 알게 된다면 여행은 두 번 다시 못 보낸다 할까 봐서였다. 물론 그런다고 안 갈 나도 아니지만.


 이 정도 이야기하자니 마치 내가 여행 혐오론자라도 된 기분이지만 나는 여전히 여행을 사랑한다. 짬이 나면 국내여행은 물론 얼마 전엔 엄마를 모시고 일본에 다녀왔으며 올 겨울엔 동생과의 졸업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나는 여행을 통해 다시 일상을 헤쳐나갈 힘과 지칠 때 돌아볼 추억을 얻는다. 떠났기에 유럽에 가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을 매일같이 마주했고 20여 년을 살면서 알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좋았던 게 그뿐이랴, 아름다운 인연들도 많았다. 낯선 곳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먼저 나서서 도와준 어느 할아버지와 손녀, 짐을 들어준 친절한 시민들과 영화 속 주인공 같았던 거리의 악사와 화가들이 있었기에 내 여행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아온 나에게 어쩌면 신은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가르침을 준 어느 성당의 사람들을 난 평생 잊지 못하리라.


우리의 여행엔 서지니도 없다 (출처:꽃보다 할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프로그램이나 SNS의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나는 조금 불편하다. 곱게 차려입고 여행을 떠난 연예인들이 싸우지도 않고 웃고 떠드는 모습에서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한정된 예산에 대한 압박도, 그 흔한 인종차별이나 소매치기도 한번 겪지 않고 일탈의 미학에 대해서만 찬양한다. 어디 그뿐인가 여행에선 매일같이 겪는 언어의 장벽, 지도 오독과 방향감각의 상실을 위기상황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황당하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직접 느끼고 보고 들었던 여행자들의 고충은 그런 게 아니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내가 서툴러서 그렇다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는 이들 중 낯선 땅에서 서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나는 우리가 앞으로 떠날 여행이 찰나의 사진처럼 아름답기만 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여행을 보다 현실적으로 알차게 즐길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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