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영화와 전혀 무관합니다.

by 칠성상회



"기상예보관 생활 45년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바람을 동반할 태풍으로 예상됩니다."


북상 중인 태풍 링링이 매미나 프라피룬보다 더 세다는 예보 탓에 바짝 긴장한 채로 잠에서 깬 오늘 아침. 평소와 다름없는 바깥 풍경을 흘끗 보고는 안도하는 것도 잠깐, 이내 찢어지는 듯한 바람의 파열음이 시작되었고 잠깐 사이에 그 빈도와 강도가 심해진다. 여물어가는 부모님의 농사에 행여 큰 피해가 생기지 않을까 마음이 시끄러워 태풍의 이동경로를 자꾸 확인하게 된다. 아침에 눈뜨면 꼭 베란다에 앉아 색종이를 뒤적이거나 바깥을 구경하는 우리 복동이는 흐엉- 거센 바람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호도도도 엄마에게 달려와 안기기를 수차례.

아파트 울타리를 따라 심어진 은행나무, 복숭아나무, 히말라야시다의 잎들은 지금 다 떨어지고 말 것처럼 탈탈 털리고 있었다. 지하주차장 입구 한편에 '손대면 손목을 잘라버립니다.'라고 써붙여 놓으시고는 매일 새벽 애지중지하시던 우리 라인 모 할머니 소유의 고추와 토마토 화분도 애석하게 옆으로 넘어져 있었다. 휘잉- 다시 바람이 불고 주차장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풀썩 넘어가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동차를 치고 말았다. 실로 태풍이 머리 위로 지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다이내믹한 광경이었다.

오래된 아파트라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샷시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유리창에 바람과 비 부딪히는 소리만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새벽에 잠을 설친 아가와 남편이 깊은 낮잠을 자는 동안 뜨거운 물로 몸을 씻고, 역시 뜨겁고 진한 라떼를 만들어 앉는다. 뒤숭숭한 마음으로 반납예정일이 코 앞인 책들을 뒤적이고 있을 때, 아버지 차와 비슷한 트럭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와 멈췄다. 긴가민가 시야가 흐린 눈을 찡그리며 내려다보고 있는데 비상등을 켠 차에서 역시나 아빠가 내리시며 조수석의 엄마에게 보따리를 건네받으신다.


크기와 때깔이 제각각인 올해 첫 아빠 사과, 햇된장 한 통, 그리고 시댁에 보내는 고춧가루를 내려놓자마자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가시는 아버지 등에 대고 벼와 비닐하우스가 어떠냐고 여쭈어본다. 물속에 벼가 다 눕지는 않았고 비닐하우스는 다 찢어졌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는데, 아까운 사과들이 다 떨어졌다며 무척 아쉬워하시는 아빠를 보고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았다. 자연이 심술을 부릴 때마다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사람이 하는 일도 아니고, 남들도 다 겪는 일인데 별 수 있냐며 괜찮다는 부모님의 말씀은 과연 진심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신선하고 맛있을 아빠의 사과를 내려다본다. 떨어져 멍들고 찍힌 사과들 중 가장 매끈하고 예쁜 놈으로 골라오셨을 것이다. 안도와 감사한 마음이 뒤섞이며 코끝이 매워온다. 다시 베란다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책장을 후루룩 넘긴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은 이후로 주야장천 듣고 있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배경으로, 바람에 덜컹이던 집도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나도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애면글면하지 않고 흐르는 대로, 부모님만큼 나이를 먹게 되면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아가가 깨고 바람이 잠잠해지면 따뜻한 디카페인 커피를 한 잔 만들어 영화를 보러 나갈 참이다. 사람이 없을 작은 영화관에서 따뜻한 점퍼를 무릎에 덮고 쉬었다 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