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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성상회 Oct 06. 2019

무채색의 일상을 빛나게 하는

쇼코의 미소, 이 따뜻한 책

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이 되면 남편과 함께 청소를 한다. 피곤하여 동공은 다소 풀려있어도 청소하는 우리 둘의 손길은 더할 나위 없이 꼼꼼하다. 결혼하고 한참은 청결과 거리가 먼 매우 털털한 부부로 살았었지만 기관지가 열린 채로 지내는 복동이를 데려온 이후로 매일같이 쓸고 닦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청소기로 우선 먼지를 없애고, 무릎이 닳아져라 손걸레질을 한다. 바닥청소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앞 뒤 베란다, 책장, 소파, 공기 청정기 등 먼지가 쌓일 곳들을 도장깨기 하듯 닦아내야 후련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 공사다망한 복동이의 촉촉한 발바닥에 먼지가 많이 묻는 날은 낮이라도 혼자서 한바탕 청소해야 하는 운수 나쁜 날이다.


그래도 손님이 방문하지 않는 한, 화장실은 게으름의 관성을 쭉 유지해도 괜찮은 영역이었다. 더러운 꼴을 잘 참는 자, 몸이 편안하리라는 생각으로 살뜰히 치우지 않았던 화장실도 아가가 욕조 목욕을 시작하고부터는 위생관리구역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화장실 문을 열어둔 채로 이곳저곳을 문지르던 참이었다. 아가가 어느 틈에 문 앞에 서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한 번씩 눈을 마주치면 엄마, 나 여기 있다고 손을 뻗으며 존재감을 발산하면서. 욕조를 닦고 돌아봐도, 수전을 치약으로 문지르고 돌아봐도, 거울에 물을 뿌리고 돌아봐도 복동이가 계속 거기에 있었다.


매일 하는 청소라는 것. 참으로 피곤하고, 또 지루한 일이다. 벅벅 벅벅 문지르고 닦는 동안엔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편했다. 어서 업무들을 해치워야 쉴 시간이 찾아온다는 사실 만이 기댈 수 있는 진리였고, 컨디션이 아무리 바닥을 쳐도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은 책임져야 한다는 어른 세계의 비정함을 쓰게 깨달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나를 지켜보는 복동이를 등 뒤에 둔 채, 짬짬이 눈을 맞추며 화장실 타일을 닦는 동안은 침침하던 마음에 환한 등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한시가 멀다 하고 놀잇감을 뒤집어엎고, 다른 장난감을 찾아 모험하는 우리 딸이 청소하는 나의 등을 한참 동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주는 복동이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아가, 엄마가 그렇게 좋아?' 질투 섞인 소리로 남편이 복동이에게 물었고, 나는 아가에게 받는 사랑이 자랑스러워 가슴이 뻐근해졌다. '아휴, 엄마 진짜 행복하다', '당신, 행복하겠다. 나도 좋네'. 복동이로 인하여, 밥풀이 뭉개진 티셔츠를 입고 청소하던 애기 엄마는 귀한 사람이 되었고, 퇴근 후 방전 상태였을 우리 남편 역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만져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점점 희미해지다 결국 사라져 버릴 엇비슷한 날들 중의 한 컷이 그렇게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았다.


점점 사람이 되어가는 세 살 내 아가. '안아주세요.' 하면 달려와 폭 기댈 줄만 알던 녀석이 처음으로 엄마를 뒤에서 양 팔로 안아주었을 때, 옆구리로 겨우 보이던 애기 단풍잎 같은 손가락을 생각한다.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꽃처럼 웃으며 나에게 달려오던 아가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무덤덤하던 마음이 아가의 분홍빛 발바닥처럼 말랑해지고 촉촉해진다. 나의 귀염둥이, 우리 애기. 내가 너를 웃게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최근에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이 책 속 주인공들은 여간해선 도드라질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순하고 평범하고 가끔 먹먹한 일상을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글로 옮긴 책이었다. 팍팍한 삶들을 포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이야기하는데, 그 덤덤한 문장들의 행간에 아름다운 순간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책 중 각각 다른 단편에서 발췌한 두 부분을 옮겨본다.


할미 독감 걸려 입원했을 때 기억나냐. 학교 끝나구 책가방 맨 너가 혼자 날 찾아왔잖여. 체육복 바지 무르팍에 풀물이 들어 있더구나. 너 여기가 어디라구 온겨, 하니까 너가 손에 든 걸 주더라. 네잎크로바 세 개였어. 너가 그걸 내 손바닥에 올려놓구 할머니 죽지 말고 아프지도 말라고 했잖여. 할민 그런 너가 귀여워서 웃었는데 네 눈에는 눈물이 꽉 차 있더구나. 지민아. 이상허지. 그땔 생각하믄 아직도 가슴이 먹먹혀. 내가 뭐라구 바지에 풀물이 들 정도로 그걸 찾구 있었냐. 내가 뭐라구 네 눈에 눈물이 꽉 차 있었냐. 나의 귀염둥이. 나의 아가야.
최은영, 쇼코의 미소 中 비밀 p.266
딸이 태어난 후로는 그늘진 마음에도 빛이 들었다. 마음속 가장 차가운 구석도 딸애가 발을 디디면 따뜻하게 풀어졌다. 여자가 애써 세워둔 축대며 울타리들, 딸애의 손이 닿기만 했는데도 허물어지고, 그 애의 웃음소리가 비가 되어 말라붙은 시내에 물이 흘렀다. 있는 마음 없는 마음을 다 주면서도 그 마음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까 봐 불안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그 마음 안에서. 따뜻했다.
아이는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 여자를 지켰다. 이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들 부모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中 미카엘라 p.241


그러니까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아기가 너무 사랑스러운데 이상하게 먹먹하여 눈을 끔벅거리게 될 때. 가진 마음을 다 주면서도 되돌려 받지 못할 일을 걱정하기는커녕 더 주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낯선 나의 모습. 아기의 볼에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스르르 허물어지고 부드러워지는 마음. 겨드랑이에 얼굴을 파묻고 자장가를 듣는 아가를 볼 때의 터질 듯이 충만한 감정 같은 것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뻔한 일상이라도 나의 감정은 수시로 일렁거린다. 이렇게 기록해두지 않으면 곧 잊히고 말 채도가 거의 없는 그런 소소한 감정들. 그래도 그런 순간들 때문에 삶에 생기가 더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쇼코의 미소를 쓴 최은영 작가도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다. 책 속 주인공들의 서사는 행복보다는 대체로 불행에 가까운 편인데도, 책을 읽는 내내 읽는 이의 마음을 알아주고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따뜻함이 나는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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