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한 또는 하나마나한.
아침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밖을 내다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소소 돋는 날. 잘만큼 자고 일어났으되 그저 또 누워서 뒹굴거리고 싶은 날이다.
우리 집 아랫목인 냉장고 옆에 앉아 건조기가 토해놓은 빨래를 억지로 개키다 큰 결심을 했다. 짧은 여행 이후 흐트러진 일상을 되돌려놓기로.
우선 미뤄뒀던 복동이와 내 파자마 줄이기를 시도한다. 복동이의 바지는 크림색, 내 것은 회색이지만 색을 맞추는 것도 귀찮다. 딸 원피스에 체리 자수를 놓을 때 꿰어둔 핑크실로 얼기설기 두 벌을 줄였다. 품이 좀 더 드는 박음질을 하지 않았어도 결과물은 흡족하여, 더 이상 배꼽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는 맞춤 바지가 되었다.
만족감에 어깨가 펴지면서 겨우 무기력이 주춤주춤 물러나는 느낌이다. 여세를 몰아 욕실 세제를 꼼꼼하게 뿌려놓고선 이십여 분간 운동까지 마친다. 게으르지만 더러운 것은 싫어하는 이상한 성미라 -몰아서 한꺼번에 치우는 스타일이란 뜻- 오래오래 공을 들여 욕실을 닦는다.
저녁, 최고로 깨끗해진 욕조에 솜사탕 향기가 나는 버블바스를 풀고 뜨끈하게 물을 받아 첫 스키를 배우느라 몸살을 앓았을 복동이를 담근다. 그리고 그녀가 요청한 대로 ‘부드럽고 고요하고 따뜻한’ 음악으로 정재형의 르 쁘띠 피아노를 재생한다.
접시물에서도 다칠 새라 욕조 옆에 앉아 책을 몇 장 넘긴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 ‘How to stop worrying and start living’. 한 권 가득 처방전을 쓸 만큼 걱정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많은 이들의 난제로구나. ’ 목적이 없는 하루하루는 무의미하게 끝나버릴 수 있다…. 해야 할 일에 몰두할 때 안정감과 평화가 찾아온다.‘ 는 책 속의 인용문을 곱씹어본다. 흔하고 당연한 조언들 같지만 흔들리는 하루를 잡아주는 나침반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바느질, 운동, 청소 모두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몸부림이었다. 다만 저 아래 깔린 불안은 오는 화요일에 출근하여 학사와 기초학력 안건 두 가지를 넘기고 나서야 해소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겠다. 오늘의 나는 이렇게 문제를 파악하는 것까지만, 그리고 미래의 든든한 나에게 살포시 할 일을 미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