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영국 아니라 중국 이야기
한동안 해본 적 없었던 장시간의 한국 체류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 올 때와 마찬가지로 베이징 따씽(大興) 공항에서 환승 대기 중이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 개장 초창기를 연상시키는 이 거대한 공항은 아직은 비교적 한산한 모습이다. 다만, 이는 공항의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으로 이용객이 적어서는 아닌 것 같다.
환승을 하게 되는 경우 기존의 셔우두(首都) 공항이 아닌 따씽을 중간 기착지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쩌면 중국은 이 거대한 공항을 동북아시아의 환승 허브로 키우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공항 환승 통로를 빠져나오는 동안 무빙워크를 따라 전시된 중국 국가박물관의 송나라 시기 동전 유물들이나, 탑승동 끝 편에 위치한 중국식 정원은 분명 외부 세계를 향한 어떤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여기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하는 현대적인 중국이 있으니 여러분들 여기를 좀 봐요' 하고 말이다.
그런 모습을 보자 나는 문득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주제가인 '北京欢迎你' (베이징 환잉 니, 북경은 당신을 환영합니다)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서울 올림픽의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도 떠올랐다. 올림픽은 특정 도시에서 개최된다고는 하더라도 어느 나라든 국가 전체의 이벤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中国欢迎你' (쯍궈 환잉 니, 중국은 당신을 환영합니다)가 아니라 '北京欢迎你'일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나는 '손에 손 잡고' 가사에 1988년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된다는 지리적 정보가 포함되어 있을지 잠시 되짚어 보았다. 내 기억엔 없었다.
가치 판단을 떠나 생각건대 '北京欢迎你'는 제국의 노래다. 제국주의 침탈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여러 민족이 하나의 정치체(polity) 안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제국이라는 말이다. 중국어를 배우다 보면 접하게 되는 일종의 공식 라인에 따르면, 중국에는 약 91%의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고 한다. 문화와 생김새, 때로는 언어까지 다른 이 다양한 공동체를 하나로 묶으려면 강력한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 올림픽 주제가에 쓰기에 어찌 보면 중국이라는 이름은 그런 구심점으로서는 너무 브로드 하다.
'北京欢迎你'라는 말에는 노래를 듣는 사람, 그리고 부르는 사람의 시선을 '제국의 수도'인 베이징으로 끌어 모으는 힘이 있다. 결국 베이징은 어차피 중국의 수도니까. 한 번의 연상 작용을 더 거치게 만듦으로써 베이징, 그리고 중국을 모두 떠올릴 수 있게 하는 표현이다. 서로 다른 시선들이 흩어지지 않고, 특정한 한 곳을 집중해서 바라보게 만드는 데는 역시 중국보다는 '베이징'이 전 세계인을 환영한다는 메시지의 주체로서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는 혼자만의 뇌내망상에 도달하였다.
쓰고 보니 고백건대 나는 줄곧 북경의 제1공항인 베이징 셔우두(首都) 공항도 왠지 중국의 수도가 아니라 여전히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뉘앙스도 함께 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 공항으로 착륙하는 모든 이들은 국적에 관계없이 이곳은 다름 아닌 Beijing ‘CAPITAL’ Airport라는 것을 리마인드 받는다. 공항이 세계 각지에서 사람이 모이는, 그리고 또 각지로 흩어지는 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곳에 ‘수도’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그 지점이 갖는 중심 허브로서의 성격을 무척이나 강조하는 네이밍이다.
그에 비하면 ‘따씽’ 즉 크게 흥한다는 이름은 보다 비정치적이고 중립적으로까지 느껴지지만, 분명 외부를 향한 우호적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이 공항에도 특이점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가게 표지판이다. 중국어, 영어 다음엔 특이하게도 러시아어로 간판이 표기되어 있다. 두 나라 간의 긴밀한 우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일까? 간판과는 무관하지만 실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서구권 국가 항공기들이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지 못(안)하게 되면서 중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국가의 항공기는 유럽-아시아 간 이동시 비행 소요 시간이 크게 늘었다. 그에 반해 중국 항공기는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고 게다가 비용도 저렴하니. 나도 베이징 환승이라는 새로운 루트를 시도해 보게된 것이었다.
또 하나는 터미널 중심부에 있는 대형 오성홍기와 정치 구호이다. 공항에 그 나라의 국기가 걸려 있는 것은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 내용은 ‘조국강대 민족부흥’이라는 꽤나 강렬한 선전문구이다. 그러고 보면 따씽(大興)이라는 말은 단순한 경제적 번영이 아니라 조국강'대' 민족부'흥'의 줄임말일 가능성이 좀 더 높아 보였다.
비록 환승이지만 오랜만에 들른 중국. 환승 시간이 애매해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중국 음식 대신 맥도널드를 택했다. 사실 영국에 살면서 중국음식보다 먹기 힘든 것이 맥도널드인 것 같기도 하다. 배달을 시킨다면 아무래도 맥도널드보다는 제대로 된 요리일 경우가 많고, 버거를 시키더라도 맥도널드 보다는 수제버거처럼 좀 더 요리틱한 버거를 시키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따씽 공항의 맥도널드는 무척이나 친절했다. 무인 주문대에서 결제가 어려워 매장 내 주문창구를 기웃거리자 점원은 적극적이고도 친절한(그러고 보니 중국어로 '적극'이라는 단어에는 친절하다는 뜻도 있다) 태도로 주문을 받아 주었다. 벌써 몇 년 전이지만, 중국에 몇 개월 살던 동안 순박하고 친절하며, 가끔 무뚝뚝한 것 같더라도 할 일은 제대로 하는 야무진 중국인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국경을 넘어 보면, 결국 우리 모두는 오늘도 각자 하루의 기쁨과 슬픔, 성취와 역경을 오롯이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인간일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