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지?
나는 운전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장롱면허였다. 다들 하는 것이라고 해서 대학 방학을 맞아 면허를 그저 따놓기만 했던 것이다. 가끔 렌트하거나 부모님 차를 운전하긴 했다. 하지만 직장을 잡고 몇 년이 지날 때까지도 서울에서 운전을 하는 건 크게 필요하지 않거나, 아니면 사회 초년생으로서 굳이 쓸 필요 없는 돈을 쓰는 느낌이었다. 물론 있으면 나름의 용도가 있었겠지만 너무 싼 차를 살 용기는 없었고, 그렇다고 돈을 더 쓰기도 싫었다. 그런 핑계로 차가 없었다.
처음 차를 구입한 것은 영국에서였다. 직장을 몇 년 다니다 석사 유학을 위해 영국에 오게 되었던 때다. 런던이 아닌 나름 시골이었기에 비교적 한산했고, 마트에 장만 보러 나가려 해도 차가 필요한 환경이었다. 더 늙기 전에 사실상의 장롱면허를 이제는 ‘activate’ 해야겠다는 핑계까지 더해져 차를 살 용기와 핑계가 생겼다.
흔히 말하듯 연습용(?) 중고차로 알아보기로 했다. 영국은 인터넷 기반의 중고차 시장이 발달해 정보가 비교적 투명하고 차량 조회 서비스도 다양하다. 그래서 운전은 좋아하지만 + 그러나 중고차에 대해서는 1도 모르는 나로서도 비교적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소심한 성격은 어쩔 수가 없어 테스트 드라이브를 해보지 않고서는 불안했던 연유로, 결국 집 근처에 있는 차들로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근처라고 해도 버스를 타고 3, 40분이나 시골길을 달려야 하는 딜러샵을 몇 군데나 돌아다녔다. 그러기를 몇 주. 그러다 집 바로 근처 샵에서 원했던 것보단 조금 비쌌지만 안전해 보이는 – 연식이나 주행거리, 내관과 외관에서 유추되는 상태 측면에서 – 차를 발견했다.
테스트 드라이브를 예약하고선 액셀레이터를 밟아보니 곧 작은 흥분감이 올라왔다. 좁고 구불구불한 영국 시골길, 낮고 푸른 구릉이 뭉게뭉게 이어지는 풍경, 아스팔트 몇 조각 정도는 거의 항상 떨어져 있어 거친 노면의 걸러지지 않은 질감, 한국과는 다른 운전대 방향까지 더해져 제법 랠리 드라이버라도 된 것 같은 착각도 잠깐 느꼈다. 딜러는 차가 마음에 드냐고 묻더니, 그럼 계약할까? 라며 리듬감 있게 거래를 밀어붙였다. 그렇게 나는 첫 차를 가지게 됐다.
작은 해치백이었다. 아무 기능도 없었다. 액셀을 밟으면 가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선다. 그러나 운전하는 느낌은 좋았다. 페달이든 핸들이든 고성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의도한 대로 반응했다. 크루즈 기능도 없는 차로 서울 부산보다도 훨씬 더 장거리인 에든버러와 그 너머의 하이랜드까지도 몇 번이나 왕복했다. 재미있었다.
차에 이름을 붙이거나 내부든 외부든 장식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첫 차였던 만큼 학위를 마치고 영국을 떠날 때는 제법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몇 년 전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그 어디에서든 차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또, 그 몇 년 사이 나는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잦은 이사를 거치면서 몇 대의 차를 더 거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녀석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갑자기 차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지금 타고 있는 차의 정기 서비스를 받으러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김에 불평을 좀 늘어놓기 위해서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타고 있는 차는 나의 첫 차에 비하면 제법 돈을 먹는 녀석이다. 그 첫 차는 함께한 2년의 시간 동안 언제든 나를 원하는 곳으로 문제없이 데려다주었다. 저렴한 엔진 오일을 먹고, 정기 서비스를 받으러 오라는 워닝 같은 것도 물론 없었다.
지금 녀석은 제법 까다롭다. 매번 받는 정기 서비스의 가격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서비스 시점이 되면 시동을 걸 때마다 서비스 시점이 도래했다는 것을 끝도 없이 알려주고, 서비스 센터로 대신 전화를 걸어줄지 물어본다. 그리고 그 시점을 경과하면 며칠이나 경과했는지까지도 매번 일깨워준다. 서비스를 미루면 시동을 걸 때마다 메시지를 없애야 하는 번거로움은 물론이고, 무언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 같은 작은 죄책감까지 느낄 수 있다.
물론 안전에 관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이 정기 서비스는 아무래도 좀 너무한 느낌이다. 영국에서는 자동차가 출고 3년이 지나면, 그다음 해부터 MOT라고 불리는 안전점검을 매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정기 서비스는 당연하게도 MOT를 통한 ‘도로적합성’ 판정과는 별개다. 이제 출고 5년이 된 이 차는 매년 기본 서비스(엔진오일 교체 외에는 ‘확인(check)’이 전부이며, 추가 작업이 필요하면 해당 비용은 별도 청구된다. 오일이야 매년 간다고 쳐도 너무 비싸다), 2년에 한 번씩은 보다 본격적인 서비스를 받으라며 관심을 갈구한다. 서비스 비용은 대략 등골이 휘는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그동안 참아 왔지만, 최근 여러 군데 목돈을 쓰고 나니 녀석이 더욱 야속했다. 게다가 오늘 간 정비소에서 차량의 과거 서비스 이력을 조회해 본 결과, 작년에 받은 ‘좀 더 본격적인 서비스’의 기록이 시스템에 없다는 것이 아닌가. 여보시오, 그게 무슨 소리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어느 정비소에서 서비스받았냐는 질문에 ‘저기 기억이 안 나는걸(그 많은 돈을 쓰고서도)’이라고 답하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여러 기록들을 확인해 본 결과 결국 예전에 서비스받은 정비소의 상호는 확인 가능했지만, 결론적으로 아직 서비스 기록을 되살리진 못했다 => (추가 업데이트) 이 글을 쓰고 약 2주가 지난 시점에 서비스 기록은 무사히 복구되었다).
지금 타는 이 차를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예전에 살던 도시를 고속도로로 지나다 나의 첫 차와 같은 색상과 모델의 차를 발견한 적이 있다. 순간 오랫동안 그리던 연인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심쿵! 했었지만, 번호판을 보니 그 녀석은 아니었다. 이제 다른 운전자와 함께 아직도 아마 영국 어딘가를 달리고 있을 그 녀석.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