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머무는 월정리 해변
만약 누군가 나에게 제주에서 가본 해변 중에 가장 예쁜 해변을 말하라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월정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월정리가 가장 좋아하는 해변이냐고 물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정말 예쁜 해변이다.
월정리는 번잡스럽게 크지 않은 동네가 에메랄드 빛 해변에 폭 안겨있는 모양이라, 남국의 여유를 즐기기에는 여기만 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2015년에 처음 봤던 월정리 해변을 생각하면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 유명해져서 해변가에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섰고 주차가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해변이다. 월정에는 해변을 따라 아주 많은 카페가 성업 중이어서, 한가로이 2층 카페에 앉아 해변을 바라보는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월정리 해변에 바로 인접한 허벅 식당이라는 곳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찾아보니 인터넷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식당이었는데 당시에도 유명한 식당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월정리 해변가에 꽤 크게 자리 잡고 있으니 그때도 제법 알려진 식당이었을 것이다.
그때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던 시점에서 이 식당을 찾아보고 들어갔는지, 해변 끝자락에 있어 한산해서 들어갔는지, 자전거를 주차하기가 좋아서 들어갔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마도 넓은 주차장이 있어 자전거를 묶어 두기도 좋고 한산해 보여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뜨거운 여름의 4박 5일 중에 두 번의 식사를 여기서 먹었다. 처음 여기에 들어간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성산포에 갔다 제주 다시 방문한 이유는 확실하다. 맛있었다. 이 얘기를 했더니 누군가는 이런 해석을 했다.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안 맛있는 게 어딨겠냐고.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번 갔던 식당을 자전거로 다니면 시간에 맞게 다시 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굳이 다시 찾아갔고, 내 기억에 아직도 남아있는 걸 보면 꽤나 괜찮은 식당이었다.
이 식당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단순히 맛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두 번째 방문할 때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장님의 눈에서 일종의 반가움의 눈빛이 느껴졌다. 그저 손님을 반기는 사장님의 눈빛이 아니라 놀람 반, 반가움 반의 눈빛. 그 눈빛이 너무 좋았다.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다가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목소리톤이 올라가는 기분 좋은 반응.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우연을 인연으로 만드는 그 설렘. 맛있는 식사 한 끼를 잊지 못해 식당을 다시 찾아간 나그네의 마음과 그 마음을 반기는 식당 주인의 따뜻한 미소의 어우러짐. 이런 찰나의 매력들이 나를 계속 떠나게 만든다.
제주 동쪽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회국수로 유명한 동북해녀촌이라는 식당이 있는 동북리라는 작은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특별히 큰 관광지가 없는 이 작은 어촌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일주를 돌 때 일정을 좀 빡빡하게 잡으면 하루에 80km씩 이동해서 제주를 2박 3일 만에 다 돌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럴 체력도 없었고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고 싶지도 않아서 여유 있게 일정을 잡다 보니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나는 원래 아침잠이 없는 편이다. 특히 여행지에 가면 아무래도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더 일찍 일어나게 되고 일찍 일어나면 동네 산책을 하거나 일출을 보게 된다. 이 날도 어김없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동네를 어슬렁 거리며 산책을 도는데 포구 바로 앞의 정자에서 어르신들이 문어를 삶아서 소주를 한잔씩 하고 계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붉은 문어가 갓 삶아져서 냄비 밖으로 나오는데, 그게 어찌나 맛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심지어 염치 불고하고 "지나가던 여행객인데 한입만 먹어보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방송에서는 이렇게 말하면 넉넉한 시골인심으로 문어다리 하나 슥슥 잘라서 주시면서 덤으로 소주도 한잔씩 주시고는 하던데, 현실에서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일상에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이니까. 아마 당시에도 이런 생각으로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는 않았나 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삶아진 문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거 보면 젊은 날의 흑역사를 만드는 기분으로 한번 도전해 볼만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왜 이제 겨우 해가 뜨기 시작한 아침 댓바람부터 소주를 드시고 계실까라는 의문을 가졌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새벽에 바다에 나가서 조업을 마치시고 먹는 아침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된 작업을 마치고 마시는 꿀맛 같은 한입이었을 걸 생각하니 못 먹어본 게 더 아쉽다. 여행은 이런 우연의 파편으로 만든 추억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과정인가 보다.
느리게 하염없이 페달을 밟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나가던 동네 강아지도 그중에 하나다. 사진에 보이는 강아지는 별다를 것도 없는 동네 누렁이다. 해변가를 어슬렁거리다가 내가 오는 걸 보더니 졸졸졸 따라오며 관심을 보이길래 잠시 멈추고 따사로운 햇살(a.k.a 뙤약볕) 아래에서 이 녀석과 망중한을 즐겼다. 이 강아지는 내가 낀 장갑에 굉장히 관심을 보였다. 한동안 장갑을 가지고 놀아주다가 미련 없이 서로의 갈길을 재촉했더랬다.
강아지 얘기를 하니까 예전에 필리핀 보라카이에 갔을 때 만난 강아지들이 생각난다. 지상낙원의 보라카이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강아지를 보라. 푸른 바다를 배경 삼아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 늘어지게 한잠 주무시고 계신다. 이 견공의 표정을 보면 아주 이렇게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순간에는 이 팔자 좋은 견공이 정말 진심으로 부러웠다.
또 다른 친구는 늘어지게 한 잠 주무시고 계신 분과 달리 아주 활발하게 운동 중이셨다. 처음에 나를 쳐다보더니 잠시 후 보라카이의 모래사장을 열심히 파더니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내 슬리퍼를 물고 달아나서 아주 당황스러웠다.
하나뿐이 슬리퍼를 물고 달아나니 당황해서 열심히 쫓아갔는데 다행히 해변가의 민가에서 키우던 개여서 자기 집 근처에 물어다 얌전히 모셔두더라. 아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지 주인분은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나도 살며시 미소를 지은 뒤 강아지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다시 슬리퍼를 회수해서 나왔다.
내가 직접 본 개 중에 가장 특이한 녀석의 주인의 지갑을 얌전히 물고 가던 백구이다. 지갑을 지속적으로 물고 가야 하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나름 교육을 좀 받았거나 똘똘한 녀석이었을 것이다. 물고 가던 지갑을 갑자기 입에서 놔버리면 그것도 곤란한 상황이 연출되니까. 물론 그렇게 허술하게 지갑을 운반해도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을 정도이니 저 지갑을 순간적으로 떨어트린다고 해서 누가 주워가기야 하겠는가. 가져가려면 진작에 강아지한테서 낚아채서 가져갔겠지
우도는 다들 너무나 잘 알다시피 성산포 앞바다에 떠있는 면적 6제곱키로미터 정도에 인구는 2,000명(1,903명, 2017년 기준)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물론 제주도의 부속도서 중에 가장 큰 섬이다.) 우도라는 이름은 섬의 모습이 소가 드러누웠거나 머리를 내민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설문대 할머니 설화에 따르면 할머니가 성산포를 빨래 바구니 삼고 우도를 빨랫돌 삼아 빨래를 했다는 그 우도이다.
이 작고 여유로울 것만 같은 섬에 예상외로 크고 바쁜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우도 우체국이다. 이 작은 섬의 우체국이면 직원도 몇 명 없고, 규모도 작을 것 같은데 기념엽서 한 장을 사볼까 해서 들어가는데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한번 놀랐고, 생각보다 택배물량이 많아서 직원들이 굉장히 바쁘고 정신없어 보였다. 사진에는 박스의 일부만 보이는데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택배물량이 쌓여있었고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많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택배를 기다리는 물건의 정체는 바로 우도에서 생산된 각종 농산물이었다.
하루에 정기적으로 몇 번씩 드나드는 배편으로 운송해야 하니 일반적인 택배회사가 들어와서 영업을 하기에는 수지가 안 맞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에서 운영하는 우체국은 이윤이 안 남는다고 우도에서 영업을 안 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체국 택배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인구에 비해 제법 큰 규모와 활력을 자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직원들과 민원인들로 북적거리는 우체국 창구에 젊은 관광객 한 명이 쭈뼛쭈뼛 들어선다. 아마 직원들은 관심도 없거니와 관심을 가져도 물을 먹으러 왔거나 화장실을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행자는 여행지에 오면 엽서를 써서 집에 부치는 습관 혹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부친이 예전부터 즐기던 취미였고, 심지어 그는 전역하는 날 양구우체국에서 집으로 엽서를 쓴 사람이었다. 그가 우도는 관광지이니 기념엽서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물어보니 직원은 매우 당황스러운 눈치였고, 영원우표 엽서를 내민다. 그리고는 이 우표에 대해 설명을 열심히 한다. 이 우표는 액면가에 상관없이 영원히 일반 보통우편을 부칠 수 있는 기념우표인데, 직원으로서는 그가 우체국 직원의 아들로 이미 출시되자마자 그 우표를 써봤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엽서 한 장을 집으로 부치고 묶어둔 자전거를 타고 다시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한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두 갈래의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낮은 언덕도 건물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나무 한그루 없는 우도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어떤 길을 선택할지 고민한다.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면 금방 길을 알 수 있겠지만 어차피 어디로 가든 돌고 돌다 보면 목적지인 우도 선착장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꼭 반드시 무언가를 보려고 우도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가다가 우연히 또 호기심 많은 강아지 한 마리를 만나면 재밌게 놀면 될 것이고.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페달을 밟는다. 인생의 선택의 갈림길에서도 이런 여유로운 마음으로 여행 가듯이 선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