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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제주 Apr 27. 2020

자전거로 제주여행

느림의 미학

 나의 세 번째 제주여행은 자전거와 함께였다.  제주도 자전거 종주는 청춘이 제주에서 할 수 있는 로망 중의 하나다. 해안도로를 따라 제주의 에메랄드 빛 바다를 감상하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려 나가는 모습은 정말 낭만적이지 않은가! 물론... 이건 정말 낭만이다(낭만적으로 자전거 여행을 다니는 수많은 라이더 분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남들이 하는 걸 보고 얘기만 듣고 있으면 낭만적일 수 있겠으나 다 제쳐놓고 일단 힘들다. 

 인간이 기계동력을 이용해서 기차나 자동차를 만들어낸 건 낭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편리해서 그렇다. 발로 살짝 힘을 주기만 해도 쌩쌩 달리는 자동차도 있고, 자전거랑 비슷하게 바닷바람을 느끼며 달릴 수 있는 오토바이도 있는데 자전거를 타는 것은 낭만의 문제를 떠나서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작열하는 태양빛 속에(실내에 계속 있다가 잠깐 나와서 햇볕을 볼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따사로운 햇볕이라고 하는 거지 하루 종일 남국의 태양을 마주하며 달리는 것은 아름다운 일도 아니고 따사로운 햇볕도 아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자면 옆으로 신나게 지나가는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이 느낌을 어디에선가 많이 느껴봤는고 하니 군대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감정들이다(많은 대한민국 예비역들은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기나긴 행군 끝에 저 멀리 부대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다 왔다고 생각하지만, 막사가 보이는 시점부터 족히 세 시간은 더 걸어야 부대에 도착한다. 인간이 왜 수레바퀴라는 것과 동력을 발명했으며, 왜 그 발명 여부가 문명의 발전 여부에 대한 척도가 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남쪽에서 서울에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서울까지 20km 남았다는 안내를 보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20km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울요금소까지의 거리다. 보통 지방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가다 N사 건물이 보이고 요금소를 통과하면 잠들어 있던 사람들이 기지개를 켜고 지인들에게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연락을 보내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걸어서는 성인 남성이 4시간 이상을 걸어야 하는 거리다.

 

 이렇게 장황하게  힘들다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자전거를 타고 제주 한 바퀴를 3일 만에 다 돌았을 것 같지만 제주에서 출발해서 성산일출봉, 우도까지 갔다가 제주로 다시 돌아오고 힘들다고 주구장창 글을 쓰고 있다(거리로 따지면 제주를 반 바퀴 정도 돌았을 것이다). 애초에 무리해서 죽기 살기로 일정을 정해놓고 한 바퀴를 돌 생각도 없었고 적당히 자전거를 타고 미음완보(微吟緩步)하며 느리게 제주를 느껴보고 싶었다. 이런 나의 의도는 완벽히 달성되었다. 차를 타고 달리면 온전히 느낄 수 없는 제주의 속살을 본 것만 같았다.


해녀들의 숨비소리 


 제주시에서 제주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달리면 성산일출봉에 다다르기 전 세화라는 곳에 있다. 오일장이 열릴 정도로 월정리나 김녕 같은 곳에 비해서 규모가 조금 큰 편인 이 동네에는 제법 큰 해녀박물관이 있다. 도대체 이 박물관이 굳이 제주에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정체모를 박물관과는 다르게 제주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는 박물관이다. 2015년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제주 북동부 해안이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되어있을 때였고, (물론 지금도 제주시내처럼 메갈로폴리스의 모습으로, 서귀포처럼 전형적이 관광지의 모습으로, 혹은 비자림로처럼 삼나무를 잔뜩 밀어내고 길을 만드는 모습으로 대대적으로 개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광지로서의 모습보다는 오일장이 서는 그저 제주스러운 모습이었고, 그런 동네 한가운데에 해녀박물관이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름 여름휴가철이었음에도 관람객이 별로 없었고,  넓디넓은 주차장은 물질을 하는 해녀의 삶만큼이나 외로워 보였다. 박물관에는 해녀의 삶을 조명하는 여러 가지 전시물들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해녀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내뿜는 숨비소리였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에 오랜 시간 동안 잠수했다가 올라오면 한 번에 숨을 내쉬면서 나는 소리다. 얼핏 듣기에는 그냥 거친 숨소리 이거나 휘파람 소리처럼 들리지만, 해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소리는 해녀들의 고단한 삶의 한이 맺힌 살풀이로 느껴진다. 어둡고 차가운 고독의 바닷속에서 물질을 하며 한참을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다시 산소를 빨아들이는 고통의 소리. 그녀들이 견뎌내야 했던 차가운 바닷물보다 더 혹독한 세월의 소리.

 

 해녀들은 나이가 들면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고 한다. 별다른 특수장비 없이 바다에 잠수하다 보니 수압에 의해서 몸이 서서히 상하게 되는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해녀들은 그렇게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던 것이다. 육지에 비해 원래 땅이 척박한 제주인데, 서쪽에 비해 더 척박하고 좁은  농토 때문에 유독 동쪽 해안에 해녀가 많은 슬픈 이유다

 

 해녀박물관을 다녀온 덕분일까. 박물관에서 들었던 그 숨비소리를 성산포에서 제주로 돌아오는 길의 바닷가에서 생생하게 듣게 된다. 아마 박물관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무슨 소리인지도 몰랐을 소리라 처음에는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그게 바로 숨비소리였다. 저 멀리 바닷가에서 해녀분들이 잠수를 마치고 올라올 때마다 그 숨비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자전거를 멈추고 한참을 넋을 잃고 듣고 있었다. 그 숨비소리가 엔진 소리가 없이 달리는 자전거가 줄 수 있는 진정한 낭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후에 차를 타고 다닐 때도 차에서 내려서 해변을 구경하다 숨비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만 호젓한 해안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다 들었던 그 첫 숨비소리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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