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국과 설국 그 사이 어디쯤
제주를 처음 가본 것은 많은 한국인의 경험과 다르지 않게 고등학교 수학여행이었다. 하지만 수학여행으로서의 여행지가 얼마나 기억에 남겠는가.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한라산의 어느 쪽으로 올라가는지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올라가는데 비바람이 불어서 매우 추워서 고생했다는 것과 서귀포에 지금도 있는 테디베어 박물관을 갔다는 사실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정도면 그냥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평범한 제주도, 아니 그 이하일 것이다. 서귀포와 중문을 중심으로 개발된 관광단지의 박물관에 들르고, 제주도에 가면 모든 사람이 가는 곳에 가서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그런 제주. 사실 수학여행이 어디를 가는지가 중요하겠는가, 누구와 가는지, 그리고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서의 기억이 더 강하게 남는다
그런 나를 제주로 다시 부른 건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후 우연히 가게 된 대학 친구들과의 여행이었다. 어쩌다 가게 됐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는다. 27살, 남들에 비해 한참 늦은 전역 후 취준생시절에 친구들과 제주도를 가게 되었고, 10년 전 관광버스를 타고 정해진 코스를 돌아다니 던 것과는 다르게 성인의 특권으로 렌터카를 빌려 제주를 여행하게 되었다.
여느 젊은이들 처럼 우리는 렌터카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렸고 애월 근처의 경치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서쪽 해안을 따라 달려 내려가던 중 중문 근처에서 갑작스러운 폭설을 만난다. 갑작스러운 폭설에 차가 제주의 낮은 언덕을 오르지 못해 원래 가려던 숙소는 포기하고 근처의 다른 숙소에 머무는 해프닝을 겪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길을 떠나는 데, 전날 밤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서귀포의 이름 모를 언덕배기에서 차바퀴에 체인을 감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경찰이 차량을 통제하고 있던 난리통은 어디 가고, 남국 특유의 따뜻한 기온으로 거짓말처럼 거리의 눈이 녹는 것과 반대로 한라산 정상에는 조용히 눈이 쌓이고 있었다.
우리가 원래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었는지, 한라상 정상에 눈이 1m나 쌓였다길래 육지 촌놈들이 눈 덮인 한라산이 그렇게 예쁘다고 하니 갑작스럽게 가기로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건 우리는 나름 아이젠도 끼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한라산으로 향한다.
한라산으로 향하는 굽이굽이 돌고도는 1139번 도로를 올라갈 때만 해도 이 한라산과의 만남이 한 청년의 제주사랑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의 한라산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는 어리목에서 나름 아이젠 등 장비를 갖추고 눈 덮인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렇게 눈이 왔는데 과연 등반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눈이 쌓인 한라산은 정말 장관이었다. 나름 강원도 양구의 군생활로 눈을 많이 봤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많이 눈이 온 것을 본건 생전 처음이었다. 일단 등산로는 눈으로 완전히 덮여서 원래 등산로의 모습이 어땠는지 전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등산로를 따라 설치된 난간의 꼭대기만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여기가 원래 등산로이며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이 나올 것이라고 안내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땅이 보일 정도로 파여있는 구덩이들은 눈이 얼마나 쌓여있는지를 가늠케 해주고 있었다.
어리목에서 나무로 우거진 터널을 지나 계속 올라가다 사제비 동산(1,424m)쯤에 이르면 두번째 사진과 같이 꽤 넓은 초원지대가 나오는데, 시야에 방해될 것이 없이 탁 트여 고요한 평온 속에 파묻힌 눈 덮인 한라산 중턱의 초원은 절경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야자수 흐드러진 제주의 모습이 아닌 또 다른 제주의 얼굴 그 자체였다.
그 장관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의 한계가 아쉬울 뿐이었다. 하얗게 눈이 내린 설원에는 키가 제법 큰 나무들만 머리를 내밀고 있었고, 이따금 검은 까마귀들이 정적을 깨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까마귀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에는 구름이 바로 머리 위로 운해를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고, 구름이 지나가면 저 멀리 제주의 바닷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 신비로움에 반해 나는 그 뒤로 문지방이 닳도록 제주를 찾게 된다. 또 다른 제주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