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의 움직이는 성>
일곱 살 때, 우리 집 TV 밑 서랍장엔 얻어온 DVD 몇 개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이름은 벼랑 위의 포뇨,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2기, 그리고 판의 미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그중 하나였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스토리인가, 의미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영화 분위기가 신비롭고 움직이는 성의 생김새가 무섭다고 생각했다. 신나서 내용을 줄줄 늘어놓을 순 없지만, 안 봤다고 말하기엔 너무 많이 봐버린 영화. 나한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그런 영화였다. 개봉한 지 17년, 내가 본 지는 14년. 최신식 영화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나이 든 영화가 재생된다.
거리에는 오랜 소문이 있다. 움직이는 성에 사는 마법사 하울이 예쁜 여자아이들의 심장을 빼 먹는다는 것. 흉흉한 소문과는 별개로 거리를 비추는 햇살은 맑고, 소피가 만드는 모자는 촌스럽다. 한창 꿈 많을 나이에 본인보다 가업인 모자 가게가 우선인 소피. 이미 하고 싶은 일을 찾은 동생 레티는 그런 언니를 안쓰럽게 여긴다. 레티를 만나러 가는길, 귀여운 소피를 보고 군인들이 치근덕거린다. 곤란해하던 소피는 우연히 하울을 만나 도움받게 되고, 그것 때문에 황야의 마녀는 소피가 백발노인이 되도록, 그리고 그걸 남에게 말할 수 없도록 하는 저주를 건다. 하루아침에 폭삭 늙어버린 소피는 놀라기는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향한다. 순무로 만든 친절한 허수아비의 도움을 받아 겨우 성안으로 들어온 소피는 불의 악마인 캘시퍼와 꼬마 견습 마법사 마르클을 만난다. 그리고 하울, 하울이 소피에게 누구냐 묻자 소피는 성의 청소부를 자청한다. 그렇게 이 넷의 요란법석 동거가 시작된다.
소피가 셋과 같이 살며 알게 된 것은 하울이 겉모습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점, 캘시퍼는 칭찬에 약하다는 점, 마르클은 영락없는 그 나이대 꼬맹이라는 점. 차가운 기계로 만들어진 겉모습과는 달리 성안이 따뜻하고 아늑하다는 점. 사랑스러운 성 밖에는 무의미한 전쟁으로 미사일이 떨어져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말리던 하울은 상처를 입고 돌아오지만 말이다. 설리만 국왕은 하울에게 전쟁에 참여하라 명령하고, 하울은 소피를 앞세워 거절한다. 그런데도 전쟁은 계속되고, 전쟁으로부터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세입자들의 여정도 이어진다.
사랑이란 뭘까. 동경했던 언니 말처럼 혀 깨물었는데 연고가 없을 때의 느낌일까? 잘 따르던 언니가 다른 언니와 친하게 지낼 때 속상했던 5학년 내 마음이었을까? 먼저 떠나버린 주인을 그리워하는 어느 만화책 속 거북이일까?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다. 소피는 말할 수 없는 허수아비를, 종족이 다른 캘시퍼를, 나이가 다른 마르클을, 성격이 다른 하울을 사랑한다. 가치관이 달라도 레티를, 마음이 달라도 새어머니를, 모자가게를 물려주신 아버지를, 소피에게 저주를 건 황야의 마녀를, 설리먼의 스파이나 다름없던 강아지를 사랑한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청나게 큰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때, 상황을 진정시킬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고 하찮을지도 모른다는 것. 우리는 고작 한 번의 눈짓에도 사람 마음에 내리던 비를 멎게 하고, 고작 한 번의 손짓에도 따뜻한 해를 띄울 수 있다. 서로가 서로의 신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