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저리>
누구나 한 번씩은 좋아하던 작품의 결말이 현실적인 문제로 아쉽게 끝나는 일을 겪어봤을 것이다. 내 경우엔 주간 만화 잡지에서 연재를 하다 순위가 밀리자 부랴부랴 완결이 난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이라는 만화가 그랬다. 초등학생 때 아주 만화 좀 본다 하는 또래들 사이에선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이 바이블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매달 열리는 서울 코믹월드 행사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좋아하는 작품의 캐릭터 코스프레를 하고 사진을 찍거나 직접 그려 만든 굿즈와 마감 마감 외치며 밤새 쓴 회지, 동인지를 각자의 부스에서 판다. 특별히 정해진 작품은 없지만 용돈 받는 학생이 많고, 개인이 제작비와 부스 대여비를 다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요와 인기 있는 작품의 부스가 많은 편이다. 그때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느냐면, 지금은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중반까지 매달에 걸쳐 서울 코믹월드 부스 9할은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일 정도였다. 오늘 감상을 쓸 영화의 제목인 <미저리>는 영화 주인공인 작가 폴 쉘던이 쓴 시리즈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다. 미저리 시리즈는 앞서 언급한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처럼 큰 인기를 끌었지만, 죽을 때까지 이 시리즈만 쓸 수는 없다는 폴의 현실적인 고민 때문에 주인공이 죽고 끝난다. 폴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깊은 산속 호텔에서 새 원고를 준비해 가는데, 가던 도중 심한 눈보라를 만나 차가 전복되고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한다.
낯선 가정집 침실, 팔과 다리는 부러져 붕대를 칭칭 감고 부목을 대고 있다. 눈앞엔 낯선 여인이 있다. 이름은 애니 윌킨스. 본인이 간호사 출신이고 엄청난 팬이라 날 따라다니다가 구해주러 왔고, 도로는 눈에 덮이고 전화도 먹통이라 병원에는 데려가지 못했다고? 날 따라다녔다는 부분이 조금 찝찝하지만 생명의 은인이니까 어쩔 수 없지. 폴은 매일 정성스레 자신을 간호하는 애니에게 답례로 아직 출판사에 보내지 못한 새 작품의 원고를 보여준다. 폴의 작품 중 미저리를 제일 좋아했고 통째로 외울 수도 있다는 애니는 폴의 슬럼가 출신 경험을 담아 쓴 신작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낸다. 이런 건 당신답지 않아요. 이건 욕이 너무 많이 나와요. 천박하다고요! 폴은 큰 모욕감을 느끼지만 아픈 몸과 외부와 연락도 닿지 않는 상태에선 애니가 꼭 필요함을 안다.
드디어 폴의 미저리 최종 편이 나오는 날, 애니는 제일 먼저 달려가 책을 사 온다. 읽는 내내 정말 좋다. 이렇게 완벽한 글은 처음이다. 최고라는 말도 부족하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애니를 바라보는 폴은 멋쩍어할 뿐이다. 미저리는 죽고 끝나니까. 그런데 책을 사 왔다면 도로가 뚫린 건가 묻자 애니는 시내까지만 뚫렸다는 식으로 말을 얼버무린다. 며칠 후, 애니가 미저리 최종장을 읽은 순간. 애니는 폴의 신작을 읽었을 때보다 길길이 날뛰며 폴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고 미저리를 다시 이어 쓰라며 새 타자기와 종이를 사준다. 폴은 살기 위해 애니의 비위를 맞추고, 애니가 나간 틈을 타 집을 뒤지다 애니가 연쇄살인 전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간호학과 우등생을 죽인 애니는 수석이 됐고, 신생아들을 죽이고 체포되던 자리에서 미저리의 '인간의 정의보다 더 높은 정의가 있다. 나는 하느님의 정의로 심판받겠다.'라는 대사를 인용했다. 반려 돼지의 이름도 미저리라 짓고, '폴의 은인이 된 자신'에 취해 있었다. 폴과 사랑이 싹트겠다고도 생각했다. 망상장애는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이나 문화적 배경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내가 바라는 이상 속의 나와 현실의 나는 너무 다르니까. 애니는 늘 미저리가 되고 싶었나 보다. 망상장애에 관한 설명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망상장애가 겪는 망상은 결코 기괴하거나 특이하지 않다. 오히려 체계적이고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예방 방법도 확실한 치료 방법도 없고 망상 외에는 사고 과정에서 장애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치료자를 망상에 끌어들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