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타이핑 중!>
비서의 덕목은 튀지 않는 것. 일은 잘하되, 사람은 없는 듯, 시력에 관계 없이 신뢰감을 높이고 시선을 끌지 않는 인상을 만드는 안경은 필수, 자연스러운 화장, 단정한 머리, 향수는 살짝만. 형편이 안 되면 비누 향이라도 풍겨야지.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신여성 무리 사이, 앞서 언급된 덕목과 완전히 비껴나간 차림새를 하고는 빨간 루주를 손수건에 급하게 문대 지우는 미운 오리 새끼 로즈 팡필이 있다. 바야흐로 1959년, 프랑스 아가씨들은 신여성 붐을 맞았다. 요리하는 남자를 신세대라 칭하고 여태까지의 여성 억압에서 벗어난 주체적이고 현대적인 직업이라며 너도나도 비서를 꿈꾸는 시대. 로즈 또한 그렇다. 생 프랭보라는 시골 마을 잡화점 딸 출신 로즈에게 비서라는 환상은 너무나 달콤한 머랭 같다. 금방 녹아 없어진다는 뜻이다.
예상대로 비서로서 로즈의 업무 능력은 빵점이었다. 그저 그런 환상만 가득하고 실무에는 도움이 안 되는 설익은 꿈. 그렇지만, 아빠가 운영하는 잡화점 일을 도우며 홀로 즐겁게 연습한 타자기 실력을 눈여겨본 루이는 시험 삼아 일주일동안만 써보겠다며 로즈를 합격시킨다. 물론, 장점이라고는 독수리 타법임에도 꽤 빠른 타자 실력과 비서에게는 쓸모없는 통통 튀고 발랄한 매력의 로즈는 해고된다. 대신, 루이는 노르망디 스피드 타이핑 대회에 출전하지 않겠느냐고 로즈에게 제안한다. 다른 뜻은 없는지 의심하던 로즈는 이대로 시골 마을로 돌아가 카센터 아들과 결혼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수락했으나, 첫 대회에서 단 2타 차이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로즈를 무시하고 본인의 오랜 짝사랑 상대인 마리를 채간 전력이 있는 미국인 친구 밥에게 우스운 꼴을 보여 흥분한 루이는 독수리 타법을 쓸 게 아니라 열 손가락을 다 썼다면 붙었을 거라며 화를 낸다. 그리고 다음 대회까지 훈련을 할 테니 본인의 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라며, 다시 비서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지구력을 기르기 위한 조깅과 집중력 훈련, 열 손가락으로 타이핑하는 연습. 지역 대회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이후, 책을 한 권씩 전부 타이핑하며 어려운 어휘와 철자에 익숙해지는 훈련이 반복되는 나날 중, 로즈의 생일이 찾아왔다. 루이는 두꺼운 양초를 잔뜩 꽂은 케이크를 필두로 선물을 보여준다. 직접 만든 자판 가리개, 자판을 안 보고도 칠 수 있다나? 타이핑 대회를 준비하며 둘 사이 분명 간지러운 기류가 흘렀고, 그렇기에 루이가 줄 생일 선물을 더 기대하던 로즈는 버럭 화를 낸다. 루이도 따라 언쟁을 벌이다가 뛰쳐 나가버리고, 로즈는 홀로 식탁에 앉아 타자기를 톡톡 누른다. 루이가 만든 자판가리개를 씌운 타자기 깊숙이 자리한 용지 위로, 미안해요. 라는 글자가 내려앉는다.
둘은 점점 사랑을 더 키우고 로즈는 프랑스 전국 대회에서도 우승하게 된다. 우승의 기쁨과 루이와의 사랑에 취한 로즈에게 루이는 이 이상 로즈의 인생에서 비중있는 한자리를 맡게 된다면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상처가 되는 말을 하며 로즈를 밀어낸다. 또한, 프랑스 전국 대회 우승의 다음, 그러니까 이 스피드 타이핑 대회의 마지막 관문은 세계 대회고, 유력한 우승 후보가 미국 대표였던 탓도 있다. 미군 친구에게 좋아하던 마리를 뺏긴 그때처럼, 다시 미국에게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비겁하고 유치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할 일이 없듯 승부에 참가하지 않으면 패배할 일도 없으니까. 전형적인 회피형의 사고방식이다.
회피형이란, 영아의 정상적인 감정 형성, 사회적 발달을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주 보호자와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애착 이론에서 파생된 애착 유형 중 하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기들은 6개월~2살 사이 몇 달 간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부모의 반응은 이 애착의 형태를 결정하는 영향을 끼친다. 1980년대에 이 이론은 어른간의 애착 관계로도 확장되어서, 부모-자식 관계 뿐 아니라 친구 관계, 애정 관계 같은 다른 사회적 관계들에도 적용된다. 그중 루이 같은 불안-회피형 또는 거절-회피형 애착은 애착 행동을 회피한다. 로즈가 정말 싫어서 미운 말을 하고 뿌리쳤을까? 답은 아니다. 루이는 로즈와의 관계로 인해 져야 할 책임들이 싫어 회피하고 도망친 것이다. 어쩌다 이런 성향을 갖게 되었는가 하면 부모의 은근한 차별 속에서 큰 탓이 크다. 그렇다고 루이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일방적인 이별 이후, 루이가 풍기는 담배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고 마리가 이상형을 물었을 땐 머릿속으로 루이를 그리며 담배는 좀 적게 피우면 좋겠지만. 깜찍하게 말하던 로즈는 담배를 피우게 되고, 전에 비해 훨씬 성숙하고 관능적여진다. 프랑스 제일의 타자기 회사 CF 모델도 되고, 뭇 여성들의 롤 모델로 자리매김한 지금. 본인이 꿈꾸던 신여성의 모습과 닮았지만, 로즈의 마음은 전만큼 행복하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택배 포장은 루이의 선물인 자판 가리개를 받았을 때처럼 좍좍 찢는다. 아빠가 로즈가 잡화점에서 쓰던 옛날 타자기를 보내왔다.
마리를 찾아가 왜 본인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대화를 나눈 루이는 로즈의 세계 대회장으로 향한다. 도움을 주는 것만이 행복인 줄 알았어. 루이에게 마리라는 ‘회피했기 때문에 실패한 기억’이 없었다면, 둘의 사랑은 영영 이루어질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때로는 불안과 좌절이 좋은 비료가 된다. 회피는 그렇지 않다. 맛없는 머랭처럼 먹을 때 즐겁지도 않은데 금방 사라지기까지 한다. 회피할수록 대면해야 하는 문제는 많아지고, 나는 정체된다. 세련된 신형 타자기를 치우고 옛날에 쓰던 구형 타자기로 결승 마지막 라운드에 참가해 잠시 활자대가 엉켰음에도 결국에는 대회를 무사히 마친 로즈처럼, 급하게 인생을 살다 발이 엉켜 넘어지면 침착하게 차근차근 풀고 다시 걸으면 된다. 어쩌다 한 번 신발 끈이 풀렸다고 평생 주저앉으면 병이 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