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나의 가장 사랑하는 타인

by LYN

2018.06



1. 나의 가장 사랑하는 타인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우리 생애 첫 번째 멜랑콜리는 어머니가 자기 자신도, 자신의 일부도 아님을 깨달으면서이다. 어머니와 내가 완전히 다른 타인이며 서로 섞일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생애사 최초의 우울은 떠오른다. 그리고 정확히 몇십 년 뒤 우리는 같은 식의 우울을 그대로 체험하게 되는데, (나의) 아이가 내 자신도, 내 일부도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김애란의 단편 <가리는 손>은 그러한 순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네 안의 어떤 것이 너를 그렇게 만드는 걸까. 그중 내가 준 것도 있을까. 만일 그게 내가 준 것도 네가 처음부터 가진 것도 아니라면 그건 어디에서 온 걸까”


아이에게서 “내가 준 것도 네가 처음부터 가진 것도 아닌” 무언가를 발견하는 그 순간, 아이의 얼굴은 돌연 낯설어져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 아이에게서 타인의 혐오감과 이질감 느끼게 되는 사건은 일상 속에서 불시에 일어난다. 아무런 이유 없이 우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 순간을 찾아오며, 이해심 없는 사춘기 아이의 말투나, 심지어는 갓난아기의 젖 투정에서까지도- 아이는 온몸으로 자신이 분리된 개체임을 주장한다. 생애 단 열 달을 제외하고 우리는 너무나 너무나도 명백히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을 가진 완전한 타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나 서로 타인일 뿐이라면, 이 관계는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타인 대 타인으로 선을 긋고 바라보기엔,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이 사랑하는 타자는 나의 존재함- 존재 방식(죽거나 사는 일)에 너무나도 깊숙이 개입한다. 그것도 꽤나 위협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요컨대, 롤랑 바르트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자동차 사고가 아니라, 어머니의 부재였다. 사랑하는 타인의 부재-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재의 현전”앞에서 그는 도저히 예전처럼 일하고 먹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니까, 근대인들의 믿음처럼 “나”는 완벽하게 고독한 개체- 자기입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때에 타자는 향유와 표상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세계를 파괴하거나 구축하는 적극적 구성원으로서 존재하게 된다.(이는 현대 존재론에서 주된 기획이기도 하다) 롤랑 바르트의 일화가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면서 겪었던 모든 이별과 만남이 이를 예증하지 않는가. 나라는 개체를 발생케 하는 이 역시 어머니라는 타자, 그리고 나의 세계를 여러 번 태어나고 죽게 하는 것 역시 사랑하는 타자이다. 그리고 이어질 논의에서 보여주겠지만, 결국 이러한 타자와의 만남- 관계 맺음은 나를 타자성 그 자체와 만나게 한다. 나로부터 벗어나 나 저편으로 끝없이 확장되는 세계에 나를 데려다 놓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밀양>이라는 텍스트 분석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 맺음으로 나의 세계가 변화하는(타자성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이를 토대로, 그 관계 맺음의 의미를 탐색해보고자 한다.



2. 밀양 : 아이를 통한 초월



이창동의 2008년 작 <밀양>은 ‘아이의 죽음’을 통해 어머니의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아이의 죽음’ 이전 어머니, 신애(전도연 분)의 세계는 ‘보이는’ 공간이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땅을 사는 척 하고(그렇게 ‘보이는’ 척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인테리어’에 관한 훈수를 둔다. 그녀는 또, 종찬(송강호 분)이 가지고 온 ‘가짜 상장’에 질색을 하지만 이내 동생 앞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것인 양 이야기한다. 그녀가 믿고 행동하는 것들은 아주 명료한 동시에 모두 속임수이다. 이는 다음의 장면을 통해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1. 신애가 전도하는 약국 주인에게 붙잡혀 있는 사이, 문 앞에 두고 온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이때 신애는 약국 주인에게 자신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있지 않다고 대답한다.)

2. 신애를 아이를 찾아 집 안을 뒤진다. 아이가 보이지 않자 신애는 마당에 주저앉아 고개를 수그리며 흐느끼는 소리를 낸다.

3. 마당 구석에서 짓궂은 표정을 한 아이가 나타나자 신애는 바로 고개를 들어 장난을 친다. 신애는 우는 척을 하고 있었다.


이 일련의 장면들, 대화들은 아이의 죽음 이전 그녀가 사는 세계의 특징들을 함축적으로 설명한다. 1) 그것은 이미지로 이루어진다. 2) 이러한 세계의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른다. 3) 이러한 특성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 세계를 대변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시간이 신애의 믿음-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구성하는지 아래의 예를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장면 <3>이 이어지기 전 <1>과 <2>의 장면만을 재생시켜보자. 우리는 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믿게 된다.


1.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 아이가 없다. 사라진 것이다.

2. 쪼그려 앉아 울음소리를 내는 여자가 있다 : 그녀는 울고 있다. 아이의 부재에 통곡한다.


이처럼 일상적인 공간, 보이는 세계에서는 진실 대신 ‘보이는’ 속임수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아이는 사라지지 않고 안 보이는 ‘척’을 하며, 신애 역시 우는 ‘척’을 한다. 우리는 이미지 이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속임수’ 들은 죽음 이후 ‘진실’이 된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더 이상 어떤 속임수로도, 그 애는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이가 아빠 코 고는 소리를 흉내 내지만, 아빠는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죽음을 통해 진실이 소환되고 부재와 마주하는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겠다) 신애 역시 아빠를 따라 하던 아이를 따라 해 보지만 어디에도 아이는 없다.


그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앞에서 신애는 자신의 믿음을 수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때문에 그녀는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로 한다. “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이었음”을 믿기로 한 것이다.(이를 두고 신애는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곳은 가시적인 세계와는 반대로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다. 아이를 죽인 살인범이 하느님을 만나 용서받았다 말하자, 신애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불명확성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당신의 용서는 무엇인가요? 누굴 향한 건가요? 당신은 실재하나요? 당신의 뜻은 어디에 있나요? 한 줄기 햇살 속에 정말 당신은 있나요? 영원한 침묵 속에서, 이제 그녀에게는 한 줄기 햇살의 의미조차 분명치 않다. 희미해져 간다.


그리고 신애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손목을 긋는다. 보이지 않는 진실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절대 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죽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도전한다. 이는 다양한 의미의 초월이다.


그것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투쟁 중이기 때문이고, 또한 죽음을 통해 ‘보이는’ 세계의 시간에서 탈주하기 때문이다. 병든 자는 일상적인 시간관념에서 벗어난다. 죽은 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시간은 더 이상 직선적인 것으로 체감되지 않는다. ‘늙어서 죽어가지 않는 것’이다. 죽음은 시간을 단절, 단축시키고 일상적인 시간관념이 가지고 있던 패턴들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성장하고 아이를 낳고, 경제활동을 하는 등의 모든 일상적- 지배적인 패턴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 ‘보이지 않는 세계’는 그 자체로 타자성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후설은 보이지 않는 세계, 나의 시야 밖 볼 수 없는 것들의 존재 가능성을 타자에게서 찾는다. 내 눈 앞에 나타난 낯선 타자는 내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세계의 증인이 된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개물로서가 아닌 “얼굴들” 혹은 끝없이 확장되는 미지로서의 타자는 내가 볼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애의 초월은 1) 나라는 개체성으로부터의 초월 2) 일상적 공간으로부터의 초월 , 마지막으로 3) 타자성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이야기로부터 앞선 질문, 아이(친밀한 타자)와의 관계 맺음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반추해볼 수 있다.



3.



쿤데라에게 초월이란 일상적 세계 그러니까, 기저귀와 생리대- 식자재 마트- 경제활동과 정치활동에서 탈주한 상태이다. 여기에는 레비나스와 같은 윤리적인 모습은 배제되어있지만, 나의 현존- 나라는 개체성 너머에 있음은 동일하다.


그에 따르면, 나를 일상적 세계에 묶어두는 것은 사랑하는 타자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함으로 그들이 살아갈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 (신애가 가시성의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기에 쿤데라에게 초월은 아이- 사랑하는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편 다른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사랑하는 타자를 통한 초월에 대해 이야기한다. 레비나스에서의 초월은 타자를 사랑함으로써 나라는 개체성을 벗어나는 일이다. 나는 나의 현존과 관계없이 나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사랑하는 이의 안전과 행복을 염려한다.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돈을 버는 것-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것- 나아가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 그의 미래에 동반하고자 한다. 그런 식으로 나는, 나의 삶의 육신의 부재와는 상관없이 ‘연장’되고 이것이야 말로 레비나스 존재론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초월이다.(이는 유교 철학의 존재론에서 소개하는 ‘효’를 통한 초월과 구성적, 내용적으로 유사하다) 이때, 쿤데라와는 반대로 나의 초월은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능동적 구성원이 되는 일이다. 사랑하는 타자들(더욱 확장시켜 헐벗은 ‘얼굴들’)이 살아갈 세계를 더욱 좋은 곳,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쿤데라와 레비나스- 이상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았을 때, 사랑하는 타자는 나를 초월케 한다. 신애는 아이의 죽음을 통해 이미지와 시간으로 구성되어있던 세계를 벗어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녀가 도달한 곳은 (물론 윤리적인 세계는 아니지만) 초월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 타자성의 공간이다. 나는, 당신이라는 타자를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을 초월한다. 당신을 만나기 이전 나의 세계와 이후 나의 세계는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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