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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우 Nov 17. 2022

소외의 오해

얼마 전 갑자기 든 생각인데, 마르크스의 ‘소외(alienation)’ 개념을 잘못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에 대해 단상이 떠올라 정리해본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마르크스를 다루는 경우가 고릿적 대학 학생회 같이 지하적 분위기를 즐기는 부류나 그로부터 성장해서 대학 안팎에 머물고 있는 운동권 계열 지식인 계층, 아니면 실천운동 차원에서 노동자 교양 정도인 것 같다. 그러나 뭔가 읽기 쉽게 설명한다 해도 그냥저냥 노동자 띄워주기 같은 이념 수준으로 대중은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철학적 차원에서 해명하고 싶은 바가 있어 쓴다.


한국사회에서 마르크스가 너무 자주 정치적으로 원용되다 보니까,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특정 정치성향을 드러내는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런 태도는 건전한 사회과학 발전을 위해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소외’를 사회학적 의미에서, 혹은 더 정확하게는 화용론적 차원에서 ‘집단 따돌림’ 수준의 유치한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혹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상당수의 안티-마르크시스트들이 소외 그런 거는 당연히 살다 보면 겪을 수 있는 거고, 어떤 차원에서 소외된다 하더라도 다른 차원에서 주류일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수준의 문화적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너무나 사회학적인 공간인 학교, 가정, 일터 정도에서는 그렇게 이해해도 무방하다. "소외시키지 말고 잘해보자~"라는 정도의 도덕주의는 소위 ‘운동권 학생회’마저도 탈정치화하면서 겪었던 과정이다.


마르크스의 소외가, 사회학적 의미에서 ‘따돌림’ 정도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좀 더 과학적인 용어이자 마르크스가 의도한 그대로의 의미는 영어 번역어 ‘Alienation’이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오역의 문제가 어느 정도 있다. 여기서 ‘alien-’는, ‘생경한’, 혹은 ‘이질적인’ 정도의 의미이고, ‘alienation’은 ‘생경하게 함’, ‘이질적으로 만듦’ 정도의 의미가 있다. 더불어 심리적인 의미 외에도 물리적인 의미가 있어서 ‘떨어뜨림’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를 종합한다면 ‘alienation’은 ‘본래 있을 곳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생경해짐’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자기 소외’를 예시로 들 때 중요했던 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창조적 활동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의 노동과 그 산물에) 생경해짐’이라는 의미이지, 노동자 계급이 사회 전체로부터 ‘따돌림’을 당해서 ‘소외감’을 느끼고 그러니까 ‘속상한 노동자들 우리가 잘 챙겨주자' 따위의 안온한 도덕 논리를 펼친 것은 아니다.


이럴 때 '소외'는 본래 노동자의 활동인 노동으로부터 창출된 가치가 타인으로 귀속되는 자본주의 구조('착취'라는 단어로 축약되는.. 이것도 도덕주의가 한껏 묻어 실패한 용어가 되어버리고 있지만)를 꼬집는 말로, 이념에 관계없이 그 부도덕함에 공감할 법한 '도둑질'에 빗대질 수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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