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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n Sep 21. 2024

서핑을 사랑하는 디자이너의 가게

그라핀 GRAPIN

부산의 송정 해수욕장, ‘컴퓨터크리닝’이라고 적힌 오래된 세탁소 옆에 시선을 끄는 작은 가게가 있다. 바로 서핑을 사랑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조성익이 운영하는 카페이자 그가 디자인하는 포스터, 굿즈 등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 ‘그라핀 (Grapin)’이다. 그라핀은 조성익 디자이너가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서핑과 그래픽 디자인을 결합한 다채로운 작업을 꾸준히 선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바닷가 앞의 낭만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그의 공간은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라핀만의 시원하고 간결한 디자인 감각을 확인할 수 있어 부산의 대표적인 디자인 스폿으로 자리 잡았다. 온 · 오프라인 스토어 운영, 그라핀 자체 그래픽 디자인과 클라이언트 작업, 그리고 서핑까지. 오늘도 조성익 디자이너는 송정 바닷가 앞의 아담한 스튜디오에서 경계 없는 활동을 쉴 틈 없이 소화하고 있다.

©Kunhee Lee




조성익 

그라핀 대표

2022년 12월 22일 목요일


그라핀을 소개해주세요.

그라핀은 서핑과 비치 컬처를 동경하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서핑과 바다, 파도를 주제로 그래픽 디자인을 전개하죠. 그리고 경계 없는 다양한 영역에서 그라핀의 색깔이 드러나는 디자인을 해요. ‘Grapin(그라핀)’이라는 이름은 graphic(그래픽)과 pine(소나무)에서 기원하는데요. 소나무는 제가 처음 서핑을 접하게 된 송정 해수욕장의 ‘소나무 송(松)’을 기념하는 의미입니다.


그라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면요?

그라핀은 열려있는 디자인 작업실입니다. 대부분 디자인 작업은 이곳에서 해요. 그라핀만의 아트워크를 전시하고 판매도 하죠. 가볍게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테이블도 있고요.

©Kunhee Lee

그라핀이 송정에 둥지를 튼 이유가 궁금합니다. 바다를 즐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도심과 거리가 있어 디자이너로서 외부 미팅을 하기에는 불편할 것 같거든요.

서핑 때문이죠. 송정은 그라핀이 위치하기 가장 좋은 곳이에요. 파도가 좋은 날은 잠시 작업실 문을 닫고 즉흥적으로 바다에 들어가기도 하죠. 만약 송정이 아니었다면 놓칠 수밖에 없는 ‘서핑하기 좋은 날’들이 꽤 많아요. 그라핀 작업물들의 감성 역시 바닷가와 잘 어울리고요. 감사하게도 디자인 업무 관련 미팅도 그라핀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편이에요. 게다가 팬데믹을 겪으며 물리적인 거리는 큰 의미가 없어졌어요. 비대면 소통이 더 자연스럽고 편해진거죠. 화상 미팅도 더 이상 낯설지가 않고, 서로 떨어져 있어도 함께 협업할 수 있는 툴이 많이 생겼거든요.


어쩌다 서핑이 그라핀의 아이덴티티가 된 건가요?

영국 학부 생활 중 2학년 여름방학에 잠깐 한국에 들어왔어요. 그때 우연히 송정에서 서핑을 처음 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완전히 빠져버렸죠. 방학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교수님이 자유주제 디자인 과제를 주더군요. 저는 서핑이 좋으니까 이걸로 콘셉트를 잡고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교수님들도 좋아하시면서 실제 디자인 필드에 공개하면 어떻겠냐며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셨어요. 어떻게 보면 그라핀의 시작이었죠. (웃음)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라핀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하고 서핑을 주제로 작업했던 티셔츠, 스티커 등 다양한 굿즈를 만들어서 판매했습니다. 그게 2014년 10월이었으니까 벌써 8년 전이네요. 한때는 업무에 방해가 될 정도로 서핑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적당한 워라밸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서핑을 즐기다 보면 서핑뿐 아니라 평소에는 알 수 없었던 바다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죠. 이런 경험은 디자인 작업 시 서핑, 바다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디테일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게 해줘요. 업무에서 받는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되고 감성적인 부분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요.  

©Kunhee Lee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셨군요?

한국에서 디자인 학부를 졸업하고 1년간 석사를 했어요. 그 후, 우연한 계기로 영국 유학을 떠났죠. 처음엔 석사 과정을 밟으려고 했지만 그 당시 제가 영어가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였어요. 그래서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 다시 학사 과정으로 입학해 영어를 익혔습니다. 계획은 ‘1년만 하자’ 였는데, 결국 3년짜리 학사 과정을 모두 들었어요. 1년만 배우고 나오기엔 정말 재밌었거든요. 영국의 디자인 교육 방식은 한국에서 배웠던 것과 전혀 달랐죠.


보통 한국 유학생들은 런던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맨체스터에서 유학한 점도 새롭네요.

맞아요. 당시 디자인 학부에 한국 유학생은 저밖에 없었어요.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는 ‘맨체스터 스쿨 오브 아트 (Manchester School of Art)’로도 잘 알려진 대학이에요. 영국에서 단일 예술대학으로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손꼽히죠. 그렇기도 하고 제가 한국에서 석사 논문을 준비할 때 공부했던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크로우(David Crow)’ 교수님이 이 대학에 계시더라고요. 이분의 수업을 직접 듣고 싶어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 입학한 이유도 있죠. 막상 데이비드 크로우 교수님의 강의는 딱 한 번만 들을 수 있었지만요. (웃음)  


그러면 영국에서 디자인 학사까지 다시 마치고 석사 과정을 밟으셨나요?

아니요. 한국의 대학 생활부터 너무 오래 디자인 공부만 하는 것 같았거든요. 거의 10년 가까이 공부만 했으니까 이제 공부는 그만하고 얼른 실무로 나가고 싶었죠. 그렇게 영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Kunhee Lee

귀국 후 바로 송정에서 작업을 시작하신 건가요?

처음엔 모아둔 돈이 없으니 학부생 때 쓰던 컴퓨터 하나만 두고 집에서 작업했죠. 가내수공업으로 굿즈들 모두 직접 포장해서 우편 보내고. (웃음) 그러다 부산대학교 창업보육원에 지원서를 제출했는데 좋게 봐주셨어요. 그래서 그쪽에서 2년 정도 머물며 스튜디오를 운영했습니다. 지금의 송정 스튜디오는 세 번째 작업실이에요. 2018년에 오픈했죠.


그라핀은 주로 서핑과 파도와 관련된 그래픽 작업을 선보입니다. 파도의 여정을 담은 인포그래픽 포스터도 제작하셨죠. 어떠한 방식으로 작업 주제를 선정하고 선보이는지 궁금합니다.

하나의 파도가 일고 부서지기까지 파도의 여정에는 생각보다 많은 용어와 이야기가 있어요. 이를 한 면의 그래픽 포스터로 작업해 보고 싶었죠. 제 경우엔 어떠한 주제를 아주 미니멀하게 표현하거나, 반대로 가능한 모든 디테일을 해부하고 편집 디자인적으로 풀어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해요. <Waves Anatomy>는 후자의 방식으로 작업한 포스터이고요.

©Kunhee Lee

그라핀 홈페이지를 둘러보니 로고, 편집 디자인부터 모션 그래픽까지 말 그대로 그래픽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선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최근에는 어떤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셨는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여러 가지 디자인 툴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포트폴리오가 쌓이는 것 같습니다. 2022년 하반기는 유독 외주 작업이 많았어요. 외주 작업에서 좀 숨통이 트이면 머릿속으로 계획하고 있던 그라핀 내부 프로젝트들을 진행하죠. 최근에는 부산시립미술관의 어린이 갤러리 관람 예절을 알리는 프로젝트로 포스터, 캐릭터, 굿즈를 개발했어요. 지금은 2023년 1월 롯데갤러리 광복점에서 열리는 <Very Wavy City> 전의 참여 작가이자 전시 디자이너로 작업 중입니다.


그라핀에서 소개하는 상품을 보면 종이 매체 외에도 패션, 특히 스트리트 패션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맥도날드 로고를 닮은 I’m loving it 서핑 보드 티셔츠가 인상적이었어요.

아무래도 서핑을 좋아하다 보니 의류 상품에서도 편안한 캐주얼 스타일 쪽으로 관심이 있어요. 특히 티셔츠는 자유롭게 그래픽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이다 보니 시즌마다 새로운 디자인이나 그림을 구상하는 편이죠. 샤카백은 실제로 서핑을 하면서 불편했던 점을 반영한 제품이에요. 서핑이나 물놀이 후 젖은 물건을 넣어도 밖으로 물이 새지 않아요. 평상복을 입고도 멜 수 있게 만든 방수 가방이죠.

©Kunhee Lee

코로나 팬데믹으로 외부 활동에 많은 제한이 있었음에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서핑이 빠르게 대중화됐어요. 관련 서브컬처가 계속 생겨나고 있고요. 그라핀 역시 서핑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 스튜디오인 만큼 국내 서핑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궁금하네요.

더 다양한 서핑 문화가 생기고 꾸준히 지속되길 바라죠. 우리나라는 유행과 변화의 속도가 정말 빠르잖아요. 서핑을 주제로 한 브랜드부터 작업을 하는 분들까지 많이 생기고는 있지만, 동시에 꾸준히 지속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종종 봤던 것 같아요. 저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이 공감하면서 실제로 겪고 있기도 하고요. 서핑 문화가 더 다채로운 모습으로 대중에게 소개되고 또 건전한 방향으로 발전하길 바랍니다.


그라핀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제가 두 아이의 아빠예요. 직접 아이들의 어린이집과 유치원 등 · 하원을 시켜야 해서 스튜디오 운영 시간도 여기에 맞춰져 있죠. (웃음) 그래서 오전에 업무를 시작해서 아이들이 돌아오는 오후 4시 30분쯤 작업을 마쳐요. 작업량이 많은 날은 큰 아이맥을 들고 퇴근해요. 집에서 작업을 이어하는 거죠.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이 시간 안에 최대한 집중도 있게 작업을 하는 편이에요.

©Kunhee Lee

클라이언트 작업, 그라핀 자체 브랜드 업무, 그리고 카페 운영까지 1인 디자이너로서 이 모든 것을 진행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나요?

브랜드를 혼자 지속하는 일 자체가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때그때 바뀌는 일의 우선순위와 데드라인을 정하고 집중하는 편이지만 어떠한 부분에서는 끝내 아쉬움이 남기도 하죠. 2022년 한 해는 유독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었어요. 이런 흐름이 2023년에도 이어지길 바라지만 모르는 일이죠. 경험상 아무도 그라핀을 찾지 않는 시기가 분명히 찾아올 겁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개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기도 해요.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힘든 시간은 꽤 많이 있었어요. 더 떨어질 곳이 없다 싶을 때도 있었죠. 스튜디오를 그만 내려두고 취업까지 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개인 작업에 더 열중하며 어찌저찌 버티다 보니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더라고요. 그렇게 연차가 쌓여서인지 보다 다양한 프로젝트로 그라핀을 찾아주시기도 하고, 스튜디오를 지속하는 일에도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됐어요. 하지만 여전히 저와 그라핀이 앞으로도 잘 나아갈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는 끝없이 고민하는 중입니다.


2018년에 송정에 터를 잡은 그라핀은 부산의 대표적인 디자인 스폿을 이야기할 때 그라핀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 됐어요. 앞으로 공간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처음 그라핀을 송정에 오픈했을 때보다 지금 더 많이 모자람을 느껴요. 소중한 시간을 내어 그라핀을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5년간 송정의 그라핀을 운영해 보니, 오픈된 디자인 작업실의 장단점이 뚜렷하게 보였어요. 공간 운영 면에서 여러 가지 고민이 생겼죠. 쇼룸은 정리하고 디자인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옮겨야 할지, 아니면 더 넓은 공간에서 그라핀의 작업물들을 선보이는 게 좋을지 같은 것들이요. 물론 여기에 계속 있을지도 모르죠. 중요한 건 어디가 됐든 변하지 않고 꾸준히 그라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공간의 운영 시간을 정리해 주세요.

그라핀은 보통 평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열려있지만, 불규칙적인 외부 업무 등으로 영업시간을 정확히 공지해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주말과 공휴일은 쉬어요.


WEBSITE | grapinworks.com

INSTAGRAM | @grapinout

CATEGORY | 디자인 스튜디오 · 쇼룸,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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