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on. Easy 작가 개인전
갤러리 ERD 부산에서 열리는 Soon. Easy 개인전 《철거예정 Demolished Soon》에서 작가는 전시의 일상이자 본질인 ‘철거’될 운명에 주목한다. 전시는 매체의 특성상 대부분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 오프닝 행사, 전시장을 채우는 예술품의 아우라, 작품 앞 사색에 잠기는 관람객까지 유무형의 것들이 화이트 큐브를 채우며 전시에 의미를 부여한다.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기에 더욱 정성을 다해 전시를 기록한다. 사진으로 남기고, 글로 적고, 작품을 구매한다. 그렇게 미술관과 갤러리는 전시가 열리는 순간에 집중한다. 작품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그 순간이 전시의 본질이므로. 그리고 다시, 이 이벤트는 본질적으로 철거를 피할 수 없다. 철거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행위이지만 화려했던 전시는 사라짐으로써 다음을 기약한다.
앞서 작가 Soon. Easy는 삶의 부정적인 면모를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표현한 작품들로 활동을 전개해 왔다. 작가 특유의 다채로운 색감을 한 일러스트는 비극적인 내용과 대비를 이루며 내용과 형식 간의 충돌을 만든다. 작가가 일상에서 관찰한 씁쓸한 현실은 작품 안에서 어색할 만큼 천진하게 묘사되며 일종의 코미디로 발현한다. 삶의 비극성을 완화하고, 외면되어 왔던 부정성을 예술로 강조하는 아티스트 Soon. Easy. 관람객은 그가 현실에 기반해 연출한 작품 속 상황에 몰입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경험한다.
이번 전시가 개최되기 전 Soon. Easy 작가는 갤러리 ERD 부산이 위치한 해운대 관광특구 일대를 답사했다.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해운대 바닷가의 넘실거리는 파도와 반짝이는 윤슬이 주는 낭만이 아니었다. 반면 그의 눈길이 멈춘 곳은 해운대 해수욕장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 호텔과 그 사이에 서 있는 낡은 아파트 ‘대림맨숀’이 주는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는 갤러리 역시 이 맨숀의 305호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주변의 고층 빌딩과 대비를 이루는 대림맨숀의 매우 허약하고 취약한 모습에 작가는 철거라는 전시의 영감을 떠올린다.
1975년 12월 준공된 총 38세대의 5층짜리 복도형 아파트 대림맨숀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존재감. 해운대 관광특구 한복판의 구축 아파트는 건설된 지 약 50년이 흐른 지금 보존의 노력 없이 진행된 재개발과 도시재생으로 서서히 수명을 다하고 있는 존재로서 보이기도 한다. 작가가 이 오래된 건물에서 미래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느낀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실제로 서울의 둔촌주공아파트를 비롯해 1970~1980년대에 지어진 수많은 구축 아파트는 재개발 이슈로 조용할 날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첨예한 이해관계 속에서 이미 철거됐거나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
Soon. Easy 작가에게는 전시 역시 철거될 운명의 오래된 건물과 다르지 않다. 전시는 언제나 미래에 철거될 운명을 가지고 시작되며 작가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전시가 열리는 몇 주 동안만 공개되고 그 후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대림맨숀 305호에 놓인 작품들은 낡은 건물과 불안정성이라는 공통된 감정을 공유하며 철거에서 시작된 담론을 Soon. Easy 작가만의 유머러스함으로 펼쳐 보인다.
현재 대림맨숀에는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는 생활 공간과 상공간이 각 층에 섞여 있다. 낡은 주거지와 감도 높은 상점이 혼재하는 풍경은 자연스레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이는 많은 이들이 대림맨숀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전히 누군가의 생활이 있는 공간이기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방문객이 많은 주말이 지나면 대림맨숀의 복도 곳곳은 무분별하게 버려진 쓰레기와 벽에 겹겹이 붙은 광고 전단 스티커, 포스터로 가득하다.
모든 아티스트에게 개인전은 계속해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기회다. 당연히 작가들은 개인전에서 한 점의 작품이라도 더 돋보이게 하고자 노력을 쏟는다. 그렇지만 Soon. Easy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본인의 작품이 빛나고 근사하게 보이는 일에 애쓰지 않는다. 그는 대림맨숀 복도 곳곳과 그 주변에 버려진 폐기물들을 모아 ‘AC unit’이라는 그의 작품 주변에 툭툭 던져 놓는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외부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전시 공간으로 옮겨온 것이다. 쓰레기 더미에 놓인 AC unit 위에는 갈매기를 묘사한 조형물 ‘Seagull’이 놓여 있다. 그리고 작품 뒤로는 ‘철거 예정'이라고 적힌 통창이, 다시 그 뒤로는 해운대의 낭만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철거될 운명의 전시장 안 어질어질한 풍경과 바깥으로 펼쳐진 관광지의 낭만은 기묘한 대비를 이루며 긴장감을 만든다. 씁쓸한 현실을 예술로써 천진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감각이 오롯이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AC unit, Seagull을 포함한 총 26점의 작품이 갤러리를 촘촘하게 채운다. 작품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불확실성이라는 작가 내면의 감정이 묻어난다. 이번 개인전의 전시 전경과 멍한 표정의 캐릭터가 병치 되며 만들어진 대비에서 예정된 전시를 앞두고 느끼는 창작자의 막연함과 불안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위치와 역경’에서 같은 비가 누군가에게는 재해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프로모션의 기회가 되는 극명한 대비의 순간을 포착하여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Fragil Happiness’에서 해피밀Happy meal과 그 위에 살포시 앉은 벌레를 묘사하며 다른 존재의 행복이 내 존재의 불행이 될 수 있는 상황을 그려낸다.
이처럼 철거, 불확실성 등 부정적인 시선에서 시작된 작가의 영감은 자연재해, 행복과 불행 등 여러 가지 현상과 감정으로 확장된다. 그에게 대림맨숀과 고층 호텔의 대비가 창작의 씨앗이 된 것처럼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서로 대비되는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아티스트의 생각을 공간에 녹여낸다. Soon. Easy 작가의 작품은 첫눈에 보았을 때 한없이 유쾌해 보인다. 하지만 작품 안에 연출된 상황을 곱씹을수록 지나치기 쉬운 일상 속 순간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작가의 시선과 생각의 무게가 전해진다. 대림맨숀의 작은 갤러리에 작가가 창조한 세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이번 전시는 오는 9월 3일을 끝으로 철거된다.
《철거예정 Demolished Soon》
참여 작가: Soon. Easy(순이지)
전시 기간: 2023년 08월 10일 - 2023년 09월 03일
전시 장소: 갤러리 ERD 부산 (수-일, 10:00-19:00)*월요일, 화요일 및 공휴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