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없습니다>
김나훔 작가는 레트로풍의 위트 있는 문구와 자신만의 색채를 결합한 작업으로 상업 광고,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쳐왔다. 하지만, 2018년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성공 궤도에 오른 것처럼 보였던 그는 돌연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아무 계획 없이 베를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내가 속한 분야에서 나름의 거창한 미래 계획들을 세웠지만 많은 것들이 내 이상과는 달리 어그러지고 말았다. 절망적이었다. 그 즈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듯 베를린으로 떠났다.”
-작가 노트 중에서
오는 3월 29일 일요일까지 ARTARCH 갤러리에서 열리는 김나훔 작가 개인전 <계획은 없습니다>는 그가 무작정 지구 반대편 나라로 떠나 무계획의 일상 속에서 경험한 놀라운 세계에 대한 덤덤한 기록을 보여준다. 베를린을 거닐며 작가는 어그러진 삶에서 벗어나 직위나 돈, 순위, 성취 같은 것들로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보았다. 한편으로 그가 생각한 기준과 계획이 이 무한한 가능성의 세상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작가는 계획되지 않은 삶 속에서 지극히 평범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시선으로 다시 그림을 그려나갔다.
대표작 <고등어>는 마음의 병을 앓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기에 작가가 그린 작품이다. 그는 우연히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고등어를 보며 ‘오늘 밤 반찬으로 올라갈 운명의 고등어에겐 내일이 없구나.’라고 생각하며 불편한 위로를 느꼈다. 가장 힘든 시기에 그린 그림이지만 지금은 그가 가장 아끼는 그림이 되었다.
<Mahlow>, <베를린1>, <친절한 직원>, <베를린2> 등 대부분의 전시 작품에서 작가가 경험한 독일 생활의 소소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Mahlow는 그가 독일에 막 도착했을 당시 약 한 달간 지냈던 곳이다. 베를린 중심으로부터 제법 떨어진 곳이었는데 하늘을 바라보기 좋은 한적한 풍경의 마을 모습을 동명의 작품에 그렸다. <베를린1>은 ‘Topography of terror’라는 전시관 앞의 풍경이다. 정처 없이 베를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다리가 아파 쉬고 있던 작가는 두 여성이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게 됐고, 그는 그 풍경을 작업에 옮겼다. <친절한 직원>은 작가가 자주 갔던 카페의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직원을 그린 것이며, <베를린2>는 저녁노을을 배경 삼아 종점으로 가는 기차 안의 쓸쓸한 풍경을 작가의 시선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독일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김나훔 작가는 강릉에 정착한다. 이번 전시는 그가 주로 작업하는 강릉을 비롯한 우리나라 곳곳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도 함께 선보여 전시의 풍성함을 더한다. 속초는 작가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기도 한데, 작품 <속초>는 속초 앞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숙소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경주2>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귀여운 곰의 모습이 관객을 미소 짓게 만든다. 작가는 바람 좋은 봄날 경주를 찾았는데, 왕릉 앞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한 마리의 귀여운 곰돌이처럼 느껴져 위의 작품처럼 표현했다고 한다.
전시 <계획은 없습니다>는 김나훔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닮았다. 히브리어로 ‘위로’, ‘위안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처럼, 이번 전시는 계획과 성취의 괴리에서 벗어나 김나훔 작가의 무계획에서 비롯된 시선과 상상을 통해 반복적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소소한 위로를 건넨다. 모두가 어려운 일상을 견뎌내고 있는 지금이지만,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그리고 위트를 가진 그의 작품이 작은 힘이 되길 소망한다.
<계획은 없습니다>
기간: 2020년 3월 4일(수)~3월 29일(일)
운영 시간: 오전 11시 - 오후 8시
장소: ARTARCH GALLERY | 서울시 마포구 독막로 9길 34
주최, 주관: 디노마드, ART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