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서리
새벽에 나선 마당은 바람이 찼다. 이곳저곳 발길 닿는 대로 눈길을 던져 보니 서리가 앉았다. 차창에도 정원 테이블 위에도 차가운 듯 맑은 듯 살포시 내려앉았다. 어디를 봐도 아직 가을이다. 첫서리를 보니 마음이 괜히 바쁘다. 모처럼 지은 가을 농사 걷을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겨울 오기 전 마무리하고 싶었던 이것저것들이 상쾌한 새벽을 망치려 들고 있었다. 찬 공기 한 다발을 폐에 욱여넣고 어지러운 생각들을 뱉기라도 하듯 후 우하고 숨을 뱉었다. 들숨 날숨을 몇 번 하고 나니 정신이 맑아진 듯 사물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이 터오고 또 나의 날이 시작이다. 그렇게 내일과 미래는 숨 한번 쉬는 공간에서도 있는 것을 늘 멀찌감치 놓고 아련히 생각하기 일쑤다. 첫서리 내리면 하고자 했던 일들은 멀찌감치 있을 때는 변변찮은 각오로 다졌는데, 막상 시나브로 첫서리가 내리고 나니 그저 멍하다. 최근에는 아주 자주 지난 세월을 돼 새김질하곤 한다. 후회를 하기보다는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그리고 진정 원하는 일로 나머지 인생을 멋지게 살자는 뭐 그런 각오들이다. 몇 년 전 신흥국 교육지원 하는 공적개발원조 사업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감사한 일이었고 일하는 내내 나를 도왔던 그 나라의 젊은이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난해서 못 사는 나라라서 희망의 끈을 잡을 수 없는 곳에 희망을 넣어주는 그런 일이었다.
내가 한 일은 그리 큰 일도 아니다. 내가 가르치는 공학 기술이 그 나라에도 필요하다고 해서 열심히 보고서 써서 예산을 따내고 작은 실습실 구성과 시범 교육을 운영한 일이었다. 한쪽 구석에서 쉬고 있을 때, 지금은 내 양아들이 된 청년이 교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이라고 했다. 마음속을 파고드는 깊은 감사에 눈물이 날 뻔했다. 이런 소명을 감당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드리고 그때의 다짐은 앞으로 이런 일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수행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다 많은 전문가들과 소통하며 더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가난한 집안, 어려운 나라의 소년과 청년으로 컸다. 이제는 돌려줄 때다. 빨리 다시 오겠다고 한 약속을 아직 못 지키고 있다. 추운 겨울을 감당해야 할 어려운 삶의 울타리에 있는 친구들이 조금 더 버티고 힘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저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첫서리 내린 날 주어진 소명을 차갑게 상기하며 먼발치가 아닌 가까운 미래를 그리고 오늘을 살고자 다짐해본다. 다시 오겠다던 약속을 빠른 시간 내에 지키길 바라며….
첫서리 내린 날 –Sim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