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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Jul 07. 2018

언제라도 도망칠, 나만의 장소가 있습니까?

공간이 주는 행복에 관하여



 다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은 공간으로부터 이런저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젊은이들이 많은 대학가에 가면 괜히 기분이 들뜨고, 조용한 숲을 찾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집에 도착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차갑고 딱딱한 사무실 분위기는 사람을 긴장시킨다. 또한 사람마다 각자의 취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활력을 주는 공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한 기분이 들게 한다.

어떤 장소에 있느냐에 따라 기분은 영향을 받는다.


  알랭 드 보통은 <행복의 건축>에서 “장소가 달라지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사람도 달라진다.”고 했다. 건축가들은 이런 특성을 이용해 ‘우리는 어디에서 가장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신경과학적인 이해를 넓히려고 한다. 사람들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더 자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람들은 공간이 자신에게 주는 영향력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공간’을 활용한다.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공간을 통해 긍정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도록 조절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마음에 딱 들어맞는 공간으로


하나는, 자신이 오래 머무르는 공간을 자신의 취향으로 변화시켜가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공간에 대한 애착의 정도나 공간을 자신과 얼마나 동일시 하느냐와 비례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인테리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흔한 예이다. 집의 생김생김은 그 집의 주인을 닮아있다. 매일 휴식을 취하는 집이 내게 이질감을 준다면 당연히 최적의 안식을 주지도 못할 것이다. 1~2년 정도의 길지 않은 시간을 머무르는 경우라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집을 차츰 변화 시킨다. 좋아하는 영화포스터를 벽에 붙이기도 하고, 소가구를 자신에게 맞게 재배치 하는 식으로.


사무실 책상은 어떤가. 핑크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무실 책상에 핑크색 마우스패드와 같은 핑크색 소품들이 자리한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사람은 가족사진이 여기저기 붙어있을 것이다. 또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거나 어질러져 있는 정도는 신기하게도 책상 주인의 성격과 잘 매치되기도 한다. 한번은 늘 풀메이크업에 칼정장을 고수하는 한 동료의 책상이 무섭도록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감탄을 한 일도 있었다. 누구도 그 책상이 그녀의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대상까지 자기 자신이 확대 되었다고 느낀다.”라고 설명한다. 책상은 확대된 자신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가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하게 되는 것이다. 자동차 또한 자기의 확장이 되는 흔한 공간이다. 그렇기에 집만큼이나 개인의 취향이 잘 반영되어 있고, 자신의 일부처럼 여기며 적응시키게 된다.

 

한 공간에 시간이 쌓이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변화를 주는 시도들이 덧대어지면, 자연스럽게 공간에는 의미가 부여되고 이야기가 채워진다. 단지 물리적인 공간일 뿐이었던 공간들은 어느새 이야기가 입혀지고 새로운 의미의 장소가 된다. 그럼으로써 공간을 통해 얻는 긍정적인 정서도 늘어난다.


사람은 자신에게 잘맞는 공간에 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
 - 바바라 페어팔 <공간의 심리학>


바바라 페어팔의 말처럼, 행복감을 위해 우리는 자신이 머물러야 할, 머무를 수밖에 없는 공간을 자신에게 맞도록 변화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느끼는 은밀한 기쁨


두 번째 방법은 좀 더 은밀한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작품에서 여성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여성해방의 목적을 두고 한 말이지만, 누구라도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만의 공간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소소한 심리적 자유로움일지라도 말이다.


각자의 자리가 구분 되어있는 사무실의 모습

 예를 들어 사무실에 칸막이만으로라도 자신의 영역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혹은 비행기나 고속버스에서 각각의 자리를 구분짓는 손잡이가 없다면 어떨까. 자신만의 영역이 확보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불편함을 느낀다. 그렇기에 손뻗을 여유조차 없는 빽빽한 만원버스나 지하철에서 느끼는 불쾌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물리적인 영역을 가지는 것만으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고 할 수 없다. 그야말로 마음을 홀가분하게 해주는 곳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일테다. 우리는 가끔 먼 곳으로의 여행을 꿈꾼다. 그 것은 단순히 새로운 장소에 대한 동경만은 아니다. 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대한 갈망, 그렇게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곳으로 훌쩍 떠날 수만 있다면 완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은 아닐까. 어디를 가도 서로에 대한 관심이 넘쳐나는 한국사회에서 여행은 ‘아주 낯선 곳’이라는 상징적인 곳으로의 떠남이 주는 해방감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신만의 공간을 찾으려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이는 우리가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타인의 시선에 결박되지 않을 수 있는 완전한 독립, 완전한 고독에 대한 욕구 때문일 것이다.

 

충전이 필요할 때는 자기만의 공간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직장에서라면 좁디좁은 화장실 안에서도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고, 여행이었다면 즐겁게 머물렀을 호텔방도 사르트르의 ‘출구없는 방’이라면 지옥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공간의 완성은 또한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한창 육아의 책임을 무겁게 느끼고 있는 한 친구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동안에 여유가 허락되는 한 집밖을 벗어나려고 한단다. 카페로 근처 공원으로 나선다. 이는 결국 자기만의 공간을 찾는 시도이다. ‘집 안’은 온통 육아의 공간이 되어버려 집 안에 있는 한 나는 ‘내’가 아닌 ‘엄마’일뿐이니 자유로움을 느끼기 어려운 탓이다.

 

자신의 역할과 책임이 육중하게 느껴질수록, 자신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곳으로 아니, 오로지 자신일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나의 쓸모가 전혀 없는 곳, 나를 규정할 수 없는 어딘가에서 잠깐이라도 머물며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혹시라도 아픈 곳은 없는지 안부를 묻고 반갑게 대화도 나누어 본다. 이렇듯 자기만의 공간이 주는 기쁨은 은밀하면서도 누구에게나 긴요한 것이다.

아이들조차도 때로는 혼자 쳐박혀 낯선 감정을 달래고 이해하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하물며 온갖 역할과 의무로 가득한 어른들에게는 어떨까.


쉼이 되어주는 장소를 찾는 일

 꼭 집안에 자신만의 ‘서재’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과만 소통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다. 또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수 있는 곳이라면 카페도 좋고 공원 벤치도 좋다. 도서관일수도, 동네 뒷산이나 아파트 산책로일 수도 있다.

오로지 자신만 아는 행복을 주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쉼이 되어주고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그 공간을 알고 있다면, 우린 언제라도 그곳으로 도망쳐 지친 자신을 충전할 수 있을 것이다.

 

몸과 마음에 딱 들어맞게 공간을 변화시켜가는 자연스런 행위. 그리고 자신에게 평안을 주는  그곳에서 이따금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 그것을 위해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가장 행복한가’, ‘어떤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가’하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건축가만 찾아야 하는게 아닌,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서 찾아야 할 기쁨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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