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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Jul 14. 2018

불행하게 될 권리를 요구합니다

통제할 수 없기에 가능한 행복에 관하여



행복이 보장되어 있는 멋진신세계?!


여기, 기쁨을 제공 해주는 알약이 있다. 이 약의 이름은 ‘소마(soma)’. 모든 불쾌한 감정을 조절해주고 계속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이 것만 있으면 우울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이 소마가 통용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이는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미래의 가상세계이다. 이곳에서는 정부가 심리적 안정과 행복문제까지도 관리해준다. 덕분에 불안정성도 불행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는 모든 인간들이 생산공장에서 인공적으로 부화되고 기계적으로 조작되어 양육되어진다. 날때부터 계급이 구분되어 그에 알맞게 발달을 제한하거나 허용한다. 모두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는 이곳의 지상명령은 “공공, 동일, 안정” 이다. 


신세계에선 누구도 불행하지 않다. 굶주림과 실업, 가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질병도, 전쟁도 없고 누구도 고독하거나 절망을 느끼지 않으며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아아, 얼마나 신기한가.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멋진 신세계여!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중에서 -

 

어쨌거나 행복을 계속해서 맛볼 수 있는 곳이라니, 호기심이 생긴다. 일상이 무료하거나, 공허할 때 혹은 너무 어렵고 괴로울 때 우리에게는 ‘소마’와 같은 기능을 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소마가 주는 효과, 그러니까 즉각적인 기쁨에 목마른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마’의 대체품을 찾는다. 손쉽게 기쁨, 그 황홀경을 느낄 수만 있다면 범법도 일삼는다. 마약이나 성범죄는 대표적인 문제사례다. 알콜중독이나 쇼핑중독도 현실을 도피하면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기쁨을 계속해서 느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그리고 법에 어긋나지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도 않으면서 가만히 앉아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 온라인이다. 우리는 그 곳을 사이버세계라고 부른다. 그곳에서는 일상의 우울한 문제들을 잊어버리고 내가 원하는 가상인물이 되어 많은 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역효과는 심심찮게 일어난다.


인터넷중독이 가져온 비극


 2009년, 한 부부가 온라인게임에 중독되어 3개월 된 딸을 방치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주목해야 될 점은 부부가 중독된 게임이 가상공간에서 가상의 딸을 키우는 롤플레잉 게임이었던 것이다. 가상세계의 딸을 돌보는 데에 빠져서 현실의 딸을 굶어 죽인 셈이다. 이 사건이 기사화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 부부는 상황이 그 지경이 되도록 어떻게 게임에 빠져있을 수 있었을까.


 게임에서 이겼을 때 우리 몸에서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도파민은 세로토닌, 옥시토신, 엔도르핀과 함께 4대 행복호르몬에 속한다. 행복감에 관여하는 뇌 신경전달물질이다. 도파민 분비에 이상이 생기면 무기력하고,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시도를 하고 난 후 기분 좋은 보상이 주어졌을 때 도파민 신경체계가 활성화 된다. 복잡한 문제를 풀었을 때나, 어려운 미션을 해냈을 때 그 짜릿함은 다시 그 시도를 하게 만드는 욕구를 유발한다. 때문에 인간이 목표를 달성하게 하고 성장해 가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면 해로운 것에 중독되게도 하는 양면성이 있다. 도박에서 승리했을 때나, 게임에서 이겼을 때도 이 짜릿함을 느끼게 되니 계속 이 기쁨을 찾다보면 집착하게 되고 만다.

더군다나 가상세계에서의 승리는 진짜세계의 그 것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획득할 수 있고, 계속해서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부부의 사례처럼 현실감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가상세계가 주는 즐거움의 문제다. 게임에 중독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식사도 수면도 잊어버리고 손에 피가 안통할 때까지 마우스를 잡고 있는다고 한다. 현실감각을 망각하고 가상세계의 즐거움에 몰두된 이 사람들의 쾌락도 우리가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이라면, 모든 이들이 이 기쁨에 빠져버린다면, 다소 끔찍한 미래가 그려진다.

 



행복에 만병통치약이 있을까?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우리가 만약 ‘멋진 신세계’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무언가 지나치게 과학이 발달되고 기계화 된 그곳의 전체주의 사상 아래에서 ‘소마’는 삶의 행복을 위한 만병통치약이 되어줄 수 있을까.

 소설 속에는 야생에서 자란 ‘존’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인간생산공장에서 인위적으로 나고 자란 기계적인 인간들과 상반되는 인물이다. 

 어느날 존은 군중들이 ‘소마’를 배급받는 곳에 가서 이 약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외쳐댄다. 신체에도 마음에도 해로운 독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러왔다고 얘기한다.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해 문란을 일으킨 죄로 통치자에게 끌려간다.

 존은 통치자와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존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준 셰익스피어 작품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과학 오락물 필리(feely)보다 더 훌륭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통치자인 무스타파 몬드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기도 한 때 진리를 추구했었지만 이제는 행복과 안락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행복을 위해서 고매한 예술을 버린 것이고, 안정과 안락을 위해 종교나 진리, 철학과 예술은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어떠한 불편이나 불쾌를 견딜 일도 없다고 합리화 한다. 그렇게 둘의 대화는 이어진다. 



존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이 좋습니다.”
총통은 말했다.
“ 우리들은 그렇지 않아. 안락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한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안락하고 즐거운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詩)를 원해요. 뿐만 아니라 나는 참다운 위험을 원하고, 나는 자유를 원하며, 선량함을 원합니다. 그리고 나는 죄를 원합니다.”

“말하자면, 자네는 불행하게 될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군.”

“저는 그것으로 좋습니다. 나는 불행하게 될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흉하게 늙어빠지는 권리, (중략) 온갖 종류의 말할 수 없는 고뇌에 괴로워해야 할 권리도 원한다는 말이겠군.”

오랜 침묵이 계속 되었다.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존은 말했다.



이 대화는 마치, 과학이 발달하고 모든 게 빨라지길 바라는 요즘의 시대에 다른 한쪽 편에서는 인문학을 계속해서 찾게 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소마와 필리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무스타파 몬드의 말대로 종교도 예술도 철학도 점차 불필요해졌을지 모른다. 존이 언급한 ‘셰익스피어’가 대변하는 것은 속도와 편리함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하면서도 고유한 내적세계가 아닐까. 

소마가 즉각적이면서도 수동적인 기쁨이라면, 셰익스피어는 느리면서도 능동적인 기쁨일 것이다. 소마가 천편일률적이고 쉽게 사라지는 기쁨을 준다면 셰익스피어는 쉽게 소화되진 않지만 오래오래 지속되는 자신만의 향연을 제공해주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인문학의 유행이 잦아들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지적 스펙의 요소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도 결국 어떤 종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가상세계로 얻는 기쁨은 ‘소마’와 유사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현실을 보지 못하고 손쉽게 얻을 수 있으면서 중독에 빠지게 하는 특징이 있지 않은가.


현실 세계에 필요한 진짜 행복


현실은 엄연히 가상세계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며, 몇가지 비법이나 전략만으로는 모두가 똑같이 행복을 거머쥘 수도 없다. 또한 게임과 달리 ‘끝판’이 없으며 ‘리셋’버튼이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삶의 끝은 죽음이며, 리셋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 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묻고 고민해야만 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야만 한다. 치트키(속임수를 쓰는 버튼)만으로는 절대 건너갈 수 없는 단계들이 있으니까.

 어린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그들에게 기쁨은 ‘가짜’만으로 충분해 보인다. 장난감 자동차, 장난감 부엌, 장난감 돈과 같은 ‘가짜’만으로 신나게 놀고 즐거워한다. 그러다 어른이 되면 점차 가짜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고, 진짜 자동차를 사기 위해 진짜 돈을 구하러 나가게 된다. 때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진짜 돈을 벌고, 진짜 음식과 요리도구 들로 요리를 한다. 이미 우리는 절대 ‘가짜 행복’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다.  


존은 결국 문명사회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살을 택하게 된다. 더는 불행해질 수도 고독해질 수도 없는 그곳은 존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계속해서 행복을 공급받을 수 있는 소마의 세계가 셰익스피어의 세계 앞에서 패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온라인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뭐든 빠른 게 인정받는 요즘. 행복조차도 쉽고 빨리 얻을 수 있는 게 사람들 시선을 끄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존이 소마가 있는 세계를 거부한 것처럼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빠르고 쉬운 행복’은 아닌 것같다. 마약과 가상세계가 주는 쾌감은 분명 우리를 잘 존재하게 하는(well-being) 기쁨이 될 수 없다.

 가상이 아닌 여기, 현실에 발딛고 있는 우리에게 진짜 행복은 무엇일까. 무작정 기쁨을 쫓기 보다, 이 질문을 먼저 던져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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