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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Jul 21. 2018

사랑은 삶을 버티게 한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에도


당신이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했어

 


 이것은 사랑고백이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대사인 이 문장은 괴팍한 성격에다 까탈스런 성격의  남자, 멜빈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어렵게 건넨 진심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결점을 극복해보고 싶다는 뜻이며, 당신으로 인해 달라지고 싶어졌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 고백은 ’사랑해‘라는 말을 대신하기에 충분하다.


출처.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멜빈의 마음처럼 사랑은 기꺼이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한다. 완고함을 녹이고, 스스로를 겸손하게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갈 수 있는 최고의 지점에 가보고 싶어진다. 가장 멋진 모습으로 그 사람 옆에 있고 싶다.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사랑은 그렇게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휴식이 되어주고, 또 사람들을 조화롭게 하며, 심지어 마음을 치유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기쁨의 기술 모두가 집약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기쁨을 향하는 마스터키 같은 것이다. 물론 ‘잘’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가장 나쁜 것 또한 포함할 수밖에 없는 법이라 한 사람을 파괴하고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것 또한 사랑이다. 망가진 사랑의 모습은 데이트폭력, 스토킹, 사생팬, 가정폭력 등이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자식사랑을 앞세워 아이들의 흉악한 범죄를 덮어버리려 하고,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부정도 서슴지 않는 황당한 모습들도 보인다. 그야말로 고장난 사랑이다. 그래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이미 오래 전에 이렇게 조언했다.


사랑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아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리는
 자기 그릇만큼 밖에 담지 못하지.

-에밀리 디킨슨의 시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어른의 사랑에 비극이 많은 이유는, 사랑을 담아낼 그릇의 크기가 나이에 비례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고 다듬고 고민하면서 숙성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계산이 빨라지고 욕심이 늘어가면서도 마음의 그릇은 오히려 작아지는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른들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을 오히려 어린아이로부터 배울 수도 있다.


10살 소년, 모모의 사랑법

내가 아는 어린아이 중에도 멋진 사랑의 기술자가 있다. 또한 그는 행복의 모범생이기도 하다. 이름은 모모. 10살짜리 남자애다. 비록 그를 둘러싼 조건들이 결핍 투성이일지라도 그는 행복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영민한 아이다. 로맹가리의 소설 ‘자기앞의 생’의 주인공인 이 소년은 세 살무렵에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졌고,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

모모가 사는 곳은 아주 가난한 동네다. 이민자, 창녀, 가족 없는 노인, 밑바닥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고아로 살아가는 모모는 외롭고, 언제 빈민구제소에 끌려갈지 모르는 처지이지만, 결코 자신의 불행을 비관하지 않는다. 하루는 강아지에게 마음을 빼앗겨 집으로 데려와서는 쉬페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최고'라는 뜻이다. 아마도 자신의 허전함을 채워줄 대상을 만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내부에 넘칠 듯 쌓여가고 있던 그 무언가를 쉬페르에게 쏟아부었다. (중략) 녀석을 산책시킬 때면 내가 뭐라도 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녀석에게는 내가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로맹가리 <자기앞의 생> 중에서


하지만 그는 쉬페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쉬페르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모모는 부유하고 착해보이는 사람에게 쉬페르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개를 주고 받은 돈은 곧바로 던져버린다.


쉬페르가 감정적으로 내게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자. 나는 녀석에게 멋진 삶을 선물해주고 싶어졌다. 가능하다면 나 자신이 살고 싶었던 그런 삶을. (중략)내가 이 말을 하면 안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오백 프랑을 접어서 하수구에 처넣어버렸다. 그리고는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송아지처럼 울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로맹가리 [자기앞의 생] 중에서


쉬페르에 대한 모모의 사랑은 소유욕도 이기심도 아니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끝까지 자신이 데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강아지의 입장에서 자신이 주어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겼다. 그 것이 비록 자신에게 큰 슬픔이 되었을지라도.


 

그는 강아지를 사랑한 것과 마찬가지로 로자 아줌마와 이웃 할아버지에게도 필요한 사랑을 주기위해 노력한다.  자신을 돌보아주던 로자 아줌마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그는 고민한다. “사랑하는 로자아줌마를 위하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그는 그녀의 대소변을 받아주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주기 위해 화장을 해준다. 또한 로자가 외롭지 않도록 끝까지 곁에 머문다.


열 살짜리 아이의 이러한 성숙한 모습은 어른들의 이기적인 사랑을 부끄럽게 만든다. 아마도 모모는 주위 사람들을 보며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주변인물들은 모두 가난과 차별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행복을 추구하고 희망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모모는 충분히 세상에 대한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이 진 삶의 무게를 어떻게 지고 가야하는지를 배우기도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하며 행복을 놓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모모는 이렇게 말한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늘 그렇듯이, 사랑이 사랑을 만들어 낸다. 철없는 사랑은 철없는 사랑을 만들어내고, 성숙한 사랑은 성숙한 사랑을 만들어낸다.


삶을 버티게 하는, 정서적 안전기지

특히, 주변인물들이 그에게 정서적 안전기지(Secure-base)의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전기지는 애착대상(주로 엄마)이 아이에게 제공하는 안전감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캐나다의 발달심리학자 에인스워스(Mary Ainsworth)가 만든 개념이다. 아이들은 어떤 위험에 처하거나 피로해졌을 때 안전기지를 찾는다. 안전감을 주는 신뢰 대상이 확보되면 외부세계를 탐색하고 모험한다. 하지만 이 관계 형성에 실패하면 아이는 지적인 호기심이 줄어들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무관심해지기도 한다.


 엄마의 보호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아이는 호기심이 왕성하고 매사에 적극적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안정적으로 애착형성에 성공한 양육자는 아이에게 암묵적으로 이런 메시지를 주게 된다. ‘엄마는 너를 믿어.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이야. 때로는 실수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어. 그리고 너가 위험할 땐 내가 지켜줄거야. 그러니 안심해도 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웃들 모두가 모모에게 이러한 역할을 해주었다. 비록 모모의 부모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신뢰감을 주었고 애착을 형성할만큼 그에게 일관된 따뜻함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불운한 조건들을 비관하지 않았던 것,  긍정적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그들이  준 용기 덕택이었다.


 정서적 안전기지의 기능은 씻겨주고 닦아주는 적극적인 돌봄이 아니다. 격려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함께하겠다는 믿음이다. 고통이나 무서움을 경험할 때는 위안을 주고, 한결같이 그곳에 있어 주리라는 약속이기도 하다.

 

어른들의 내적성장을 위해서도 안전기지는 꼭 필요하다. 신뢰가 충만한 연인과의 관계나 친구관계에서 우리는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안정감을 통해 많은 영역, 예컨대 일과 대인관계 따위에서 용기를 내어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 이러한 역할을 해주며 상생해간다. 어른의 삶에서 안전기지가 주는  큰 힘은 ‘버티는 힘’이다. 운동을 할 때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버텨내야만 근육이 늘고 건강해지는 것처럼 마음의 근육도 마찬가진다. 시련이 주는 괴로움을 피하지 않고 충분히 버텨내는 순간 그 고비를 넘길 힘이 길러진다. 그 순간에 사랑의 안전기지가 되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건너가게 된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수많은 순간에 사랑하는 애인의 위로 한마디로 건너갈 힘을 얻지는 않는가. 혹은 오늘하루 겪은 속상함이나 분노, 혹은 슬픔을 친구와의 전화한통으로 털어버리고 잠들지는 않는가.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위기의 순간들을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모여서 한뼘씩 성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결국 모두가 서로에게 정서적 안전기지가 되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연인이든 배우자든 자녀든 당신으로 인해 안정감을 느끼고, 당신의 품이 아닌 곳에서도 도전하고, 실패하면서 자신의 폭을 넓혀가길 바란다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부족함은 모른 체하며 나는 상대에게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저지르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허울뿐인 사랑의 모습과 사랑을 가장한 비극이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변질되어간다고 해도 여전히 모모처럼 멋진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늘 존재한다. 누군가는 그 사랑으로 인해 콤플렉스를 가능성으로 끌어올리고, 오랫동안 아물지 않았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순간순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가.’  아니, 어쩌면 그보다 이렇게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그 사람은 나로 인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가.’ 





오늘도 제 브런치를 찾아주시고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유난히 더운 여름이네요. 독자님들 모두 잘 지내고 계신가요.

앞으로도 한동안 무더운 날씨가 지속된다고 하네요..

지치기 쉬운 날들이지만 ,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지켜내는 여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음주 토요일에 또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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