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결정권자는 나 입니다.
상대방을 잘 안다는 오만함에서 벗어나기
나는 결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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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타인이 제공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만들어내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열등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준을 두고 나를 부족하게 만드는 게 바로 열등감이죠. 열등감은 비교 대상이 있어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남과 나를 비교하며 나의 부족함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열등감이 우월감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아시나요. 불교심리학에서는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는 마음 활동을 통틀어 ‘자만’이라고 합니다. 흔히 우월감을 느끼는 게 자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월감뿐만이 아니라 열등감, 그리고 내가 남과 동등하다고 여기는 마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교’로 인해서 생성되는 마음의 한 줄기인 거죠.
다른 존재와 나를 비교하며 아파하는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들판의 꽃들도 제 모습대로 피어날 뿐 다른 꽃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치자꽃이 화려한 진달래를 보며 자신이 더 못났다고 슬퍼할까요? 계절에 따라 피고 지며 살아갈 뿐 다른 꽃을 닮아가려 애쓴다거나, 다른 꽃보다 내가 더 잘났다고 우쭐해지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꽃보다 연약한 존재일지 몰라요.
그런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비교하는 마음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불교명상을 연구해 온 미국의 1세대 명상 지도자인 조셉 골드스타인Joseph Goldstein은 이렇 게 조언합니다. 비교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단지 그 마음을 관찰하라고요. 자만심이 일어날 때 낙담하거나 자기를 비난할 필요도 또 놀랄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그저 ‘아! 또 일어나는군’ 하면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고정된 게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비교하는 마음을 자만심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이유는, 사람간 대부분의 문제가 ‘모르는 것을 안 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태도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단면만 보고 자신과 비교하는 것도 실은 타인을안다고 착각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복잡한 존재인 인간을 자로 재는 것처럼 간단하게 파악해서 비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실수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만연해 있습니다. 부모는 제 속에서 낳았다는 이유로 자식이 성인 이 되어서까지 그들의 삶에 개입합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죠. 그뿐인가요. 친한 친구끼리 또 연인이나 부부관계에서도 ‘당신은 어떠어떠하다’는 식으로 쉽게 정의를 내리고 비난의 도구로 삼아요. 그걸로 인해서 서로를 침범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요.
그런데 과연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안다’고 말할 수있을까요?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타인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리하여 외워야 한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서로에게 복창해야 한다. 내가 아는 건 오직 내가 당신을 모른다는 것뿐이다. (...) 모르니까 설명해주고, 초면인 것처럼 경청하라. 알고 있다는 믿음을 부수고, 끝내 알 수 없다는 자각을 반복하지 않으면, 지옥은 깰 수 없다.
이윤주, 《나를 견디는 시간》, 행성B, 77~78쪽
이윤주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아는 건 오직 그 사람(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에 대해서 모른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에서 발생하는 흔한 실수가 바로 타인의 문제에 쉽게 침범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인관계에서 기억해야 할 세번째가 바로 ‘타인과 나의 몫 구분하기’ 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임을 기억해야 해요.
타인과 나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해 생기는 문제는 크게 두가지로 나타나요. 하나는 의존입니다. 내가 해야 할 선 택앞에서 확신이 서지 못해 늘 부모님이나 친구의 의견에 기대는 경우이죠. 안심하기 위해 늘 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게다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으면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하기도 해요. 나의 삶을 나 아닌 다른 이에게 내줘버린 셈이죠.
또 다른 하나는 간섭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인생을 쥐락 펴락하려는 것처럼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는 거죠. 이는 가족 간에 흔하게 일어나는 상황이면서 친구나 직장 내 관계, 연인 관계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가까울수록 경계를 침범하기가 쉽고 또 가까울수록 내가 타인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쉽기 때문이에요.
간섭은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에게 나의 뜻을 강요하는 것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를 도와주려는 마음에 과도하게 에너지를 쏟는 것도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한 어머니가 백수 아들이 안쓰러워 계속해서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경우를 상상해봅시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불편해서 아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지속하는 걸 수도 있죠. 어머니의 지원 때문에 오히려 아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기회를 잃게 되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홀로서기를 할 생각을 못하는 건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기도 하고요.
많은 사람이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앞세워 타인을 자꾸 받쳐주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의 삶에서 가장 시급한 ‘자립’을 지연시키고 맙니다. 그게 정말 사랑일까요? ‘타인을 위해서’ 개입하는 일이 진짜로 그 사람을 위한 길인지, 아니면 내 마음이 편해지려고 하는 건지 구분할 필 요가있습니다. 타인과 내 몫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하는 거죠. 특히 우리는 동양의 집단주의라는 문화적 특성과 어릴 때부터 서로 경계없이 지내온 가정환경의 특성으로 인해 이 부분에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자가 지닌 경계가 너무나 다른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더더욱 의도치 않게 실수하게 되고 갈등을 겪게 됩니다. 어떻게 현명하게 구분해야 서로 침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모든 문제가 대인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했던 아들러 또한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들러는 ‘과제의 분리’를 강조했습니다. 타인의 과제와 내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는 거죠. 그는 아주 명료하고 간단하게 두 과제의 구분기준을 알려 줍니다. 그건 바로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된다는 거예요.
자녀의 성적이나 진로 문제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녀 본인이죠. 백수 아들이 구직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면 그 결과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누구도 서로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기 때문에 선택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은 당사자 한 명입니다. 나는 나의 삶을 책임지고, 너는 너의 삶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나의 과제를 타인에게 떠넘겨서도, 타인의 과제를 내가 짊어져서도 안 됩니다. 또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고 한들 그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내 인생의 결정권자는 결국 나니까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 가지 모두 그리 쉬운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에 방심할 경우 마음이 위 협받는 것은 물론이고, 내 삶의 방향키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분명해요. 사람 사이에서 마음을 단단하게 지켜내는 것. 그건 곧 내 삶을 내가 단단하게 이끌어간다는 것과도 같아요. 어떤가요.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정도는 기꺼이 실천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실천해나가는 데에 용기가 될 만한 짧은 기도문을 전하며 응원을 대신하려 합니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너는 너의 일을 한다.
나는 너의 기대에 맞춰 살려고 이 세상에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너도 나를 위해 살려고 이 세상에 있는 게 아니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우연히 서로 일치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_ 심리학자 프리츠 펄스
https://1boon.kakao.com/bookbanggu/264
위 글은 저서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 중, '사람사이에서 마음을 단단하게 지켜내기'라는 제목의 글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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