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깨달음은 한편으로 위로가 됩니다. 왜냐면 '나만 이렇게 아팠던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심리상담을 통해 만나는 내담자들의 얘기 또한 결국에 가족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많은 상처가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픈 사실입니다.
가족이 누구에게나 안전한 테두리는 아니라는 것은 최근의 많은 아동학대 소식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 것이 현실입니다.
어쩌면 가족주의와 가족신화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모든 개인이 더 안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또 우리의 상처가 조금은 덜 해지고, 더 빨리 아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많이 조심스러운 얘기들이라 쓰는 내내 어려워했던 기억이...^^;
부족한 글이지만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겐 작은 지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
지난봄 상담을 요청했던 20대 민지(가명) 씨는 무척 선한 인상이었다. “어떤 일로 상담을 찾게 되었어요?”라는 질문에 한마디를 떼지 못하고 펑펑 울던 모습이 아직도 아프게 남아 있다. 그녀의 고민은 다름 아닌 ‘가족’에 있었다.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인문계 학교도 포기하고 상업고를 진학해 일찍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그녀는 10여 년 동안 가족만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동생들의 용돈을 책임지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엄마와 여동생을 세심하게 챙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족들은 당연한 듯이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고, 세상 편하게 놀고 있는 남동생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도 힘들다고 어렵게 털어놓았을 때 ‘젊은 애가 뭐 그리 힘드냐’는 아버지의 차가운 말은 큰 상처가 되었단다. 그동안 가족들을 챙기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겠고, 자신을 위해서 요가학원을 등록하는 것조차 죄책감이 앞섰다고 한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억울함이 쌓여서 일상까지 흔들리자 상담실을 찾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가족은 든든한 울타리라기보다는 무거운 짐이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이렇게 마음의 상처가 가족으로부터 비롯되는 경우는 낯선 모습이 아니다. 상담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지인들과 조금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봐도 알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가족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부모님의 불화, 가정폭력, 경제적인 어려움, 부모님의 차별로 인해 받은 상처, 형제자매간의 골이 깊은 갈등처럼 무수한 이유로 회복되기 어려운 아픔을 안고있거나 여전히 진행 중인 경우가 많다.
그 상처를 회복하는 곳은 오히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웃에게서, 친구에게서, 때로 선생님이나 동료 같은, 가족보다 먼 관계로부터의 위로를 통해서다.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를 가족이 아닌 관계에서 치유하는 모습이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복합적인 감정으로 얽히는 너무 친밀한 관계인 가족보다 적당히 거리가 유지된 관계 속에서 공감과 존중이 더 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낳았다는 이유로, 또 한 이불을 덮고 산다는 이유로 모든 걸 다 안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태도가 상처를 낳는다면, 반대로 ‘나는 너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겸손한 태도가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알고 보면 모두가 공감과 존중이 필요한 연약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가족처럼 경계가 모호한 관계에서 더 결핍되기 쉬운 이유가 그 것이다.
체감하는 현실이 이러하니 ‘가족’이라는 단어 앞에 쉽게 붙이는 ‘화목한’ 혹은 ‘따뜻한’이라는 수식어는 다소 불편하다. 아무래도 그것이 보편적인 가족의 모습을 표현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겠다.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다양한 문제를 안고 살면서 상처를 주고받는 ‘가족’. 그 아래에 가족주의와 가족신화가 있다.
가족주의, 가족신화의 위험성
가족주의란 개인보다 가족이 우선시되는 이념이며 생활원리이다. 개인의 가치보다 가족의 가치를 상위에 두며, 가족의 유지, 단결, 가족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때문에 가족구성원의 독립성이 존중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고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작동하기도 한다. 특히나 학업, 진로, 연애, 결혼 등 개인의 삶에서 큼직큼직한 선택이 부모의 뜻과 다를 경우 갈등을 겪게 된다. 개인주의가 강한 서양에 비해 한국의 가족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범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말하자면 가족이라는 구조를 지켜내는 대신 개인의 심리적 건강은 지켜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가족주의인 것이다. 나아가 여기에서 비롯된 상처는 ‘가족신화’로 인해 더 심화된다.
가족신화는 가족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족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신념을 말한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인, ‘따뜻한 가족’ 또는 ‘화목한 가족’은 신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어느 집단보다 안전하고 든든한 울타리이며 버팀목이라는 기대 또한 마찬가지다. 이상적인 모습일 뿐 보통의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비합리적인 신화는 가족으로부터 경험하고 있는 문제를 은폐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 가족만 이렇게 문제가 있나’라는 생각으로 비정상의 범주에 자신을 밀어 넣기 때문에 수치심을 느낀다. 나 또한 어린 시절에 가족 문제로 속앓이를 하면서 남들에게 한 번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유가 ‘우리 집만 유난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아픔으로부터 나를 구해내지 못했다. 가족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가족이기 때문에 더 상처받기가 쉽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 시기를 버티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이처럼 가족신화는 상처로부터 회복될 기회를 놓치고 심리적으로 고립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위험한 신화는 ‘가족 구성원이라면 공통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가족주의가 배어있는 이 믿음은 개별 구성원의 욕구를 보려하지 않거나,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거라 쉽게 단정짓는 잘못을 범하게 한다. ‘부부는 일심동체’ 혹은 ‘가족은 운명공동체’ 라는 표현도 그렇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개개인의 고유성을 흐려버리는 강제성을 띈 표어로 작용할 수 있다. 제아무리 한지붕 아래 살아가며 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는 관계일지라도 내면에는 서로 다른 색깔과 결을 지닌 존재다. 동상이몽이라는 말처럼 같은 이불 속에서 살을 부비고 살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게 인간이 아니던가. 상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보려 하지 않고 넘겨짚고 뭉뚱그려버린다면 상처와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그럴수록 공감과 위로를 찾아 가족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이렇듯 개별 구성원에 대한 존중이 빠진 가족주의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가족신화는 우리를 더욱 아프게하고 서로에게서 더욱 달아나게 만드는 게 현실이다.
가족신화가 아닌 가족현실로
물론, 화목하고 건강한 가족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족’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기는 어렵다. 즉, 지향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 현실은 아니라는 얘기다. 개인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는 것처럼 가족 또한 다양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심지어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만, 쉽게 드러나지 못할 뿐.
이번에 큰 이슈가 된, ‘정인이 사건’도 그렇다. 정인이는 입양된 가정에서 학대를 당하다가 결국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불과 몇 달 전에는 의붓아들을 여행가방에 가두고 숨지게 한 또 다른 사건도 있었다. 모두 가정 안에서 일어난 폭력과 살인이다. 입양이나 의붓부모로 인한 사건보다 친부모로 인한 학대비율은 더욱 높지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웃이나 학교, 기관에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 생명은 죽어간다. 그만큼 가족은 폐쇄적인 집단이다.
‘안전하고 따뜻한 곳’이라는 가족에 대한 단면적인 인식은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로부터 사람을 보호해내지 못한다. 오히려 가족을 더 폐쇄적인 집단으로 만들어 위험하다. 그렇지 않아도 이웃 간 교류가 적어진데다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가 강화되어 고립되어있는 탓에 보호받기가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당연한 듯이 가족을 안전한 테두리로만 여겨 법과 정책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 가정폭력이 의심되어 이웃집에서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은 “남의 가족 일에 참견 말라”는 남성의 말에 사실 확인조차 없이 돌아가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너무나 위험한 상황임에도 ‘가족인데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쉽게 넘겨짚는다. 또한 주변에서 관심을 갖고 아동학대 사건을 신고하더라도 친권을 내세워 빠져나가거나, 오히려 신고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버리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과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안전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가정 안에서 수시로 학대, 폭행, 심지어 살인사건이 일어나 뉴스를 장식하는 세상이다. 가족문제를 철저히 사적인 영역으로 분류하고 안전하다고 넘겨짚는 것, 또 가족구성원을 소유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심각하게 재고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모든 인간이 공동체이기 이전에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생명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힘없이 위험 속에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가정 안에서의 학대나 폭력과 같은 문제들은 극단적인 사례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어쩌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안고 있는 보편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가족이란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울타리일 수 있는 동시에 가장 위험하고 가장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개인이 쉽게 털어놓지 못할 고민과 아픔을 안고 사는 것처럼 가족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때로는 가족이라는 이름이 누군가를 더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가족 또한 결국 타인들의 집합
요즘은 직장을 구할 때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는 일단 피하고 본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가족적인 분위기’란 밥 먹듯이 야근을 하고, 주말에 불러내거나 무리한 업무를 요구하더라도 쉽게 거절하기 힘든 환경인 탓이다. 회사를 위해 당연한 듯 개인이 희생되어야 하는 현실이 ‘가족 같은 회사’라는 이름 뒤에 숨겨져 있다. 이렇듯 개인이 존중받지 못하는 집단은 이제 날이 갈수록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당연하다. ‘나’가 지켜지지 못하는 공동체는 제 아무리 행복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으니까. 가족주의와 가족신화로부터 구해내야 하는 것도 결국엔 사람이다.
가족의 가장 최소단위는 대체로 부부에서 시작된다. 부부는 비혈연이다. 남남이라는 것이다. 최근 증가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다. 타인과 타인의 만남으로 가족은 이루어진다. 이상적으로는 이 가족으로부터 안정과 행복을 기대한다. 남남이 만나 서로 사랑하고 신뢰를 주고받고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삶의 행복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삶의 핵심이다. 혼자보다는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누군가와 함께 작은 공동체를 꾸리는 것. 꼭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지 않더라도 이것이 가족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행복하고 싶은 개인이 또 다른 개인과 만나 가족을 이루었을 때, 가족을 앞세워 개인이 지워져서는 안 된다. 구성원 모두가 자기만의 욕망을 지닌 인격체이며 자율성과 인권을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가족은 당연히 ‘화목하고 안정된 관계’가 아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더 위험할 수 있고 다치기 쉽다. 그렇기에 더 노력하고 더 배려해야 하는 관계라는 것을. 그런 현실적인 이해가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며, 가족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상담실을 두드리는 일 또한 줄어들 것이다. 공허한 가족주의와 가족신화에서 벗어나 모든 개인이 존중받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사회이기를 기대해본다.
* 위 글은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교육전문지 <민들레>의 Vol.133 호에도 실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