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세살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가 실명을 밝히는 걸 싫어할 수도 있으니 '여름이'라고 부르도록 할게요. 요즘은 그 아이를 면밀히 관찰하는 게 저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인데요. 그 아이의 미소를 볼 때면 너무 맑고 밝아서 '세상에, 저 웃음에는 1%의 오염도 없어!' 라고 놀라곤 해요. (반대로 '저 짜증에는 1%의 오염도 없어!'하고 놀랄 때도 있답니다. ^^;) 또 여름이 특유의 표정이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저건 의심할 수 없이 100%의 여름이인걸!!!' 하고 종종 감탄합니다. 겉과 속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존재를 보는 기쁨, 온전한 존재를 마주하는 기쁨.. 여름이로 가득찬 여름이를 만나는 기쁨이랄까요. 그건 거의 경이로움에 가까운 거지요. 아이의 인지는 점점 발달하고 있으므로 (눈치가 발달하고 있다는 거죠) 이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기에, 저는 지금의 이 짧고 강렬한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와 함께하면서 문득 나로 가득찬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생각은 사실 '문득'이라고 하기엔 몹시 개연성이 있는 히스토리가 있습니다. 아이를 갖기 전부터 저는 늘 오랫동안 '나 자신이 되고 싶다.'는 갈망을 안고 있었어요. 이건 아마 '자주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욕구이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건 조심스럽습니다. 왜냐면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어머 쟤는 다 거짓이었던거야? 가식이었던거야?' 라고 생각할까봐 두렵거든요. 긴 얘기가 있지만 차치하도록 합니다. 중요한 건 저는 늘 진실되고자 애써왔다는 것이겠지요. 뭐든 누구든 진심으로 대하고 싶어하고, 그러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어쨌든, 다시 그 '히스토리'로 돌아와서, 그런 욕구를 가지고 살던 제가 세달전쯤부터 제 내면에 집중할 기회를 저 자신에게 주고 있는데요. 상대적으로 자극이 적은 환경 (저는 폴란드의 소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이전에 살던 서울, 바르샤바에 비하면 조용한 동네이지요.)에 있고, 이상할 정도로 건강이 자주 삐걱거리면서 마음의 문제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고, 서둘러 쓰고 있던 네번째책을 꼭 서둘러 쓸 필요는 없어지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제 내면을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기회라고 생각했고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최대한 많은 시간을 쓰기로 했어요. 그게 뭐하는거야? 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 같은데요. 네..저는 INFJ입니다. 내면세계, 마음, 자아, 등등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 관심이 많아요. (피곤하게 사는 유형..)
제가 구체적으로 해온 것은 이런 겁니다. 내 욕구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기.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감정에 머물러보기. (예를 들어 불안할 때, 이전에는 그 불안을 알아차리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을 했다면, 지금은 그 불안을 마주하고 응시하고 함께하면서 그 불안을 온전히 감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과 관련되어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안아주기. (비록 그 것이 자기혐오와 같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이런 내면작업(?)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1년반만에 심리상담을 다시 받기로 합니다. (상담가도 계속해서 상담을 받습니다.)
도대체 이런 걸 왜하는 건가 싶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아주 빨리 갔습니다. 제 내면은 매우 바쁘고 요란했거든요. 그리고 육아와 살림을 하는 입장에서 온전히 저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고요. 그렇게 제 내면을 관찰하고 알아주고 이해하는 시간을 거치면서 저는 저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언젠가 이 곳에 풀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좀 더 용기를 낸다면 그럴 수 있을 거에요.)
요점은 그렇게 저 자신과 가까워지면서 어떤 욕구는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그 중 하나가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였습니다. 아마도 그건 '나 자신이 되고 싶다.'는 갈망의 연결선상에 있는 거겠지요. 너무 많이 알아버린, 또 너무 많이 경험해버린, 그래서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이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생각보다 많은 절차가 필요합니다. 세살 여름이의 경우 아무 문제가 없겠지요. 의식해야 할 시선도 없고, 좋고 나쁨을 가리는 필터도 없고, 무엇보다 자신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없을테니까요. 그러나 (저를 포함한) 어떤 어른에게는 그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 됩니다. 나를 검열하는 내 안의 목소리가 아주아주 많거든요. 그런데 그게 너무 하고 싶어진 거에요. 좀 더 가볍게. 좀 더 편안하게 나의 생각을 풀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격렬하게 궁금해져버린 거지요.
그저 엄마아빠와 함께 밥을 먹을 뿐인데 즐거움에 들떠 있는 아이를 보며 생각합니다. '즐거운 표정을 따라가 보면 줄기도 뿌리도 즐거움일 것 같아!!'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도 똑같은 즐거움이 발견될 것이 틀림없었어요. 오염이 없는 아이의 감정, 숨기거나 포장할 줄 모르는 아이의 표현을 관찰하며 저는 곧 그 아이의 마음을 봅니다. 그 아이의 꽃잎과 뿌리는 다르지 않을테지요. 여름이도 결국엔 사회적 존재이기에 점차 페르소나를 만들어가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100%의 여름이 입니다. 그걸 보는 저도 즐겁지만, 계산없이 오롯이 자신일 수 있는 저 아이의 느낌은 어떨까. 저 아이의 삶의 무게는 깃털같을거야. 자꾸만 궁금해져요. 지금의 제가 저 자신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너무나 저 자신이고 싶네요. (이 무슨 말장난..;;)
그리하여 이 글은 그 시도 중의 하나가 됩니다. 나 자신이 된다는 게 엄청 추상적이고 어렵게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별거 아닌 것 같아요. 이렇게 좀 더 나로 가득찬 글을 써볼 수도 있는거니까요. 그래서 제 브런치에 [나로 가득찬] 이라는 매거진을 만들어 봅니다. 가끔 이 곳에 좀 더 편안한 (하지만 용기가 필요했던)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 마음의 좀 더 아래쪽에 있는 이야기. 그렇게 나의 꽃잎도 줄기도 뿌리도 모두 나로 가득찬, 그런 순간을 하나 쌓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