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두시간 떨어진 작은 도시. '도시'라는 어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촌스럽고 낡은 느낌이 많이든다.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보면 '아 여기는 유행이라던가 발전이라던가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구나' 싶다. 폴란드로 오기 전 살았던 동네가 판교였는데, 수도인 서울과 가까운 곳인데다가 IT회사가 많다보니 도시 전체가 젊고 발전된 느낌이 물씬 드는 곳이었다. 집근처에서 동네 도서관까지 가는 십분 거리에 세련되고 감성 가득한 카페가 즐비하고, 온갖 맛집과 그곳을 드나드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쾌적하고 풍족한 느낌이 드는 동네였다. 거기서 드는 풍요로운 느낌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그런데..그 곳과 상반된 이 촌스럽고 발전되지 않은 이 곳 푸오츠크(Płock)가 참으로 편안하고 좋다. 충분히 촌스러워도 되고, 빠르게 발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듯한 분위기. 나에게 더할것도 꾸며낼 것도 없다고 말하는듯한 (물론 누구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 풍경들이 저절로 나를 이완시킨다. 조용하고 느긋하다. 모든 것이 빠른 서울에 비해서야 아주 불편한 것도 많고 그 흔한 스타벅스 하나도 없는 곳이지만 왜인지 나에게는 안락함을 준다.
그래서 나는 이 곳에 어느정도 적응이 된 작년연말부터 이 환경을 충분히 누리고자 해왔다. 자극이 덜해서 나에게 집중하기 좋은 곳이니, 기꺼이 충분히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나의 마음을 따라가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내 일상은 참으로 단순해졌는데, 이 단순함이 좋아서 더욱더 단순해져보기로 했다.
단순한 삶
남편이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는 분 중에는 Doyle 이라는 영국분이 계시는데 , (우리는 그를 도일아저씨 라고 부른다) 그분은 아내와 세자녀들과 떨어져 이 곳에 혼자 살고 있다. 나와 내 아이가 이 곳으로 오기전까지 남편과 도일아저씨는 매일 저녁 함께 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종종 우리가족과 함께하는데,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불편함만 제외하면) 그는 참 편안해보이고 유머러스하고 사는 걸 즐기는 듯해보여 같이있으면 '사는 건 쉽고 재밌는 거야'라는 메세지를 주는 것 같다. 당연히 그도 인간이니 뭐든지 그렇게 쉬웠기야 하겠냐마는 (알려두건데, 능력도 있으신분이고 계속 성실하게 일해오신분이다), 그의 삶의 태도가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게 아닐까 싶다. 그가 우스겟소리로 '나는 축구와 맥주만 있으면 돼. 허허' 라고 했던 말이, 나에게 울림을 주었다(?). 축구랑 맥주만 있으면 충분한 삶. 그 건 참 단순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살고 있었기에 더 와닿았다. 그리고 부러웠다. 재벌집 막내아들보다 부럽고 그 어떤 부,명예 혹은 멋져보이는 이름들보다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일 아저씨는 축구랑 맥주만 있으면 사는게 충분히 즐거워. 그렇다면 나에겐 무엇이 있으면 될까? 생각해 보았다. 한국에 살 때는 특히나..일도 잘하고 싶고 살림도 잘하고 싶고, 옷도 잘 입어야 할 것 같고, 돈도 많아야 할 것 같고, 뭔가 똑똑해야 할 것 같고, 운동이나 취미도 잘 즐겨야 할 것 같고, 사랑도 받아야 할 것 같고, 많이 줘야 할 것 같고....와 같은 끝없는 그러나 은근한 야심(?)이 나를 밀고다니는 듯 했다. 그런데 이 곳, 푸오츠크로부터 단순한 삶을 격려 받으며 살다보니 너무 많은 걸 연연하지 않아도 아니..그럴수록 내게는 더 이롭다는 걸 알아간다.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살아보고 싶다.
물론, 한국에서도 단순하게 가볍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외부자극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 유혹에 약한 사람, 주변으로부터 쉽게 영향받는 사람이다. 그런 나를 알기에 통제가 필요할 때에는 주변환경을 그에 맞게 세팅하는 식으로 나를 조절해왔다. (나의 의지력은 솜사탕처럼 가벼우므로 ㅎㅎ) 그런 나에게 한국은 확실히 반짝반짝하는 것들이 많은 곳이긴 하다.
어제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도 지웠다. 장점이 참 많은 어플이지만, (심지어 유튜브로 영어공부도 하고 있는중이었음 & 내 채널도 있음..ㅎㅎ) 아주 짧은 시간안에 많은 자극들을 주는 것이라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동안은 일단 지워본다. 유튜브는 필요하면 컴퓨터를 열어서 보면 된다. 중요한 일이나 시험을 앞둘 때에는 원래 SNS는 잘 삭제해두는 편이었다. 불안할 때는 무의식중에 들어가는 일이 잦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복잡하고 무겁게 살아가게 만드는 핵심요인인 '생각', 생각 요놈을 덜어내기 위해 수행을 일상 속에서 늘려보고 있다.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리고 호흡에 집중한다거나, 내 신체감각에 집중한다거나, (밖이라면) 하늘, 바람, 나무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식으로 생각이 늘어나지 않도록 평소보다 더 의식적으로 애쓴다. 불필요한 생각을 더 많이 덜어내면, 그러니까 나에게 그리 이롭지 않았던 판단이나 회상, 상상, 상념들을 비우고나면 나는 또 어떻게 변화할까. 가장 궁금한 지점이다.
아직 몇일 되지 않아 변화를 말하기에는 이른감이 있지만 확실히 수면의 질이 좋아졌다. 폰을 드는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무의식중에 폰을 열어 사진을 보거나(우리 여름이 ㅠㅠ) 웹서핑을 하는 일이 생긴다. 폰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 생각을 많이 하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자극들이 생겨나므로 점차 더 줄여보고 싶다.
오 이렇게 쓰다보니, 우리의 삶을 단순해지지 못하게 만드는 큰 주범이 휴대폰이 아닌가 싶다. 다음주에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로 8일동안 여행을 가게되니, 더 어렵지 않게 휴대폰free 상태로 지내볼 수 있겠다. 그 때 의미있는 변화가 생긴다면 이 곳에 또 기록해 보겠다.
해가 길어져 저녁먹고 산책을 하면 이런 풍경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