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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장_촉진하는 밤

살아나는 밤과 사라지는 아침 그리고 김소연 시인

오늘의 문장은 밤과 어울리시는 김소연 시인님의 신간 시집, 『촉진하는 밤』(문학과지성사, 2023)에서 가져왔습니다.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_ 「촉진하는 밤」 중에서


‘촉진하는 밤’이란 제목과 ‘김소연’이란 이름을 보고 브레이크 고장 난 차처럼 알라딘 접속-장바구니 담기-해외배송 버튼을 눌러버렸습니다. 올해부턴 문학동네와 웅진북센에서 책을 주문하기 시작했는데, 마침 급하게 주문해야 하는 책이 생겨서 함께 주문했습니다.


준서가 9시 정도에 자러 들어가면 저는 설거지와 보리차 끓이기와 쓰레기 버리기를 시작합니다. 이 세 가지가 퇴근 후 제가 맡은 가사입니다. 물론 자기 전에 목욕과 간단한 청소와 빨래 역시 저의 몫입니다. 이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10시~11시 혹은 자정이 됩니다. 아내와 30분~1시간 정도 대화를 하고 나면 비로소 제가 깨어납니다. 아빠, 남편, 관장, 교장 등의 역할을 마치고, 온전히 제가 깨어나는 시간은 자정 무렵에서 새벽 3시까지입니다. 신경숙 작가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오전 9시까지 글을 쓰신다고 하셨는데, 저는 새벽 3시 무렵에 자서 오전 8시에 일어납니다. 퇴근하기 위해 출근하는 사람처럼 밤이 오길 기다리며 아침을 맞이할 때가 많은 거 같습니다. 내가 사라지고, 사회 구성원으로 태어나고,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가사 마무리로 보리차 끓이려고 하는데, 보리차가 없어서 한인마트 간 김에 옆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내일 아침까지 구입, 시집, 보리차, 햄버거 삼합

밤에 저는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고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시가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로 끝나면 그냥 그런 이야기가 되겠지요. 김언 시인이 해설에서 말한 대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교훈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저 대목만 부각되었다면 위의 시는 매우 간편하게 읽히고 끝날 것”(해설, 169p)입니다.


밤에 자성해도 아침이 밝고 사회 구성원의 옷을 입고 나가면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지독하게 반복합니다. 그림자까지 사라지게 할 거 같은 정오의 햇빛은 이런 일을 물러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북돋게 만듭니다.


새벽에 남긴 문장을 아침에 읽으면 밤엔 확실히 ‘어딘가 미친 구석’이 있는 제가 깨어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독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2023 문학의 밤은 ”나의 코로나 연대기-코로나19 시대를 통과하며 깨달은 것들”이란 주제로 어린이는 어린이의 언어인 동시로, 청소년은 자신만의 덤덤한 이야기를 산문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이 또한 지나갔습니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던 긴 터널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습니다. 지금은 시간으로부터 회위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일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 싫지만, 대부분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이전의 경험이 무용할 만큼 긴 터널을 통과하는 구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남긴 기록이, 처방전은 아니더라도 진통제 역할은 해 줄 것입니다, 견딜 힘과 마음을 줄 거라 믿어요.

의식의 흐름대로 작성한 오늘의 문장은 김소연 시인의 시로도 충분히 좋을 거라 믿고,  불현듯 생각난 고명재 시인의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리하여, 언제든 사라져버릴 사람을 우리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_ 고명재, 「눈사람」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난다, 2023) 전문


사라져버릴 때까지 쓰고 싶습니다. 도서관은 내일 오전 10시에 개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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