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을 만드는 사람들
과도한 정의감, 설익은 방법, 대의를 가장한 집단 이익.
이 세 가지는 언제든 폭탄의 원료가 된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명분이 희미하고 무고한 희생이 뒤따른 전쟁의 이면에는
대개 이 세 가지가 서로 얽혀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전쟁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역시 수많은 마찰 위에 세워져 있다.
갈등과 충돌, 그리고 봉합을 반복하며
정반합의 과정을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가면 안 되는지,
지켜야 할 선이 어디인지
조금씩 배워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것을 온전히 제어하지 못한 채
비슷한 방식의 사고를 반복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사고의 당사자는 종종 사라지고,
그 여파는 주변으로 흩어진다는 사실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조용히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그 파장은
일상을 흔드는 폭파음처럼 다가온다.
나는 청소년들과 ‘사적인 복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왜 사적인 복수는 위험한가,
우리는 왜 선을 지켜야 하는가,
왜 느리고 번거로운 절차와 법을 따라야 하는가.
여러 질문을 나누었다.
어떤 일은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행동을 멈추게 한다.
말은 발화되고,
어딘가에 닿는다.
그 닿은 말은
누군가에게 꽃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불이 되기도 한다.
같은 말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사람을 향한 말은
그 사람의 명예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명예는 쌓기 어렵고, 무너지기는 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종종 타인에 의해,
특히 ‘정죄’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배운 공동체가
정작 정죄의 늪에 빠지는 장면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목격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히어로물을 보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누군가를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쉽게 규정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불편할 수는 있어도
제거해야 할 존재는 아니다.
법은 이런 감정의 충돌로부터
사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적법한 절차 없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법은 ‘유죄’를 선언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다.
그럼에도 명예훼손이 허무한 이유는
무너진 명예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과정을 감당하는 일은
때로는 ‘더러워서 포기하고 싶을 만큼’ 지난하다.
사람을 정죄하는 길은 비탈길과 같다.
처음에는 정의를 이루고 있다는 쾌감이 있지만,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그 아래에서 누가 다치고 있는지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 순간에는
이미 많은 것이 무너진 뒤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어딘가에 부딪혀야 멈추듯,
정죄 역시 큰 상처를 남긴 뒤에야 멈춘다.
방관과 인내는
겉모습이 닮아 있다.
그러나 그 방향은 다르다.
방관은 무관심으로 흐르지만,
인내는 회복을 바라본다.
인내하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 안에 있는
회복의 가능성을 믿는다.
자성할 수 있는 힘을.
가능하다면 싸우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싸워야 한다면
그 방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중동의 평화를 빈다.
그리고 우리 동네의 평화도 빈다.
아무리 대의가 옳아도
방법이 잘못되면
정죄의 유탄은 엉뚱한 곳으로 튄다.
명예는
지키려 하면 명예욕이 되고,
놓아줄 때 덕이 된다.
명예욕은 언제나
정의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리고 결국,
그동안 쌓아온 명예까지
해일처럼 무너뜨리고 사라진다.
나는 오늘
말로 꽃을 피우고 있는가,
아니면 불을 옮기고 있는가.
집을 나서기 전에
잠시 거울을 보자.
나는 이 아름다운 계절 속에서
어떤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