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으로 말미암아 생긴 피로나 병
호바트에 갔다 온 후 여독인지 뭔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귀찮음에 빠져버렸다. 아직도 나는 여행 중인데, 여독이라니. 진짜 웃기다. 과제는 밀려 있고 텅 빈 냉장고를 채워 넣어야 했으나, 아니 짐부터 정리해야 했으나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일단 내일 생각하자. 하루를 그렇게 푹 쉬었는데도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자꾸만 쉬고 싶다.
이렇게 게을러진 내가 어색하지만 게으름에 허우적대는 즐거움을 알아버린 나는 조금 더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 뭐 사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리 좀 늦게 한다고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과제는 목요일까지인데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좀 더 미뤄도 되지 않을까 하는 변명을 해본다.
하지만 막상 밥을 먹으려 하니 참 난감하다.
옷은 많아도 입을 옷은 없다는 것과 음식은 있지만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진리다. 계란, 시리얼, 김치, 쌀. 냉장고 속에 음식은 있었지만 특별히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오늘만 그런 것은 아니고 냉장고가 꽉 차 있을 때도 사실은 무엇을 먹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가벼운 음식이 먹고 싶어 샐러드와 과일을 잔뜩 사 온 다음날엔 빵이나 치즈 같은 느끼한 음식들을 찾았고, 막상 사고 나면 다 먹지를 못해 유통기한이 임박해서야 꾸역꾸역 먹곤 했다. 그러고는 시간이 지나면 또 사는 이상한 행동들을 반복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꽤 많은 음식을 해 먹었다. 토르티야 랩, 김치찌개, 볶음밥, 제육볶음, 김밥, 떡볶이, 파스타, 가츠동, 비빔밥 등등.. 그런데 이상하게 새로운 음식이 먹고 싶다. 오늘 저녁 반찬은 뭐 해 먹지, 밖에서 먹는 음식은 다 맛있어라고 늘 말씀하셨던 엄마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일주일에 한 끼, 혹은 두 끼를 제외하고 전부 내가 해 먹어야 하는 이 상황도 지겹고 거의 2주 만에 돌아가는 학교도 가기 싫다. 한국은 지금 중간고사 기간이라던데 환경은 다르지만 공부하기 싫어 죽겠다는 그 마음은 참 공감이 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도 이곳은 진짜 내 일상이 아니다. 낯설고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고,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가오지 않는 듯한 그 끝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정말 싫다. 내일이면 끝날 시험인 걸 알면서 지금 당장은 공부하기 싫은 것처럼, 다이어트를 하려면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당장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짜증이 나는 것처럼 대체 언제까지 차가운 밤공기를 가득 메우는 외로움과 싸우고 버텨야 할지 모르겠다.
교환학생에 선발되기만 한다면, 그래서 외국 대학에서 다른 시선으로 관광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해보리라 다짐했었다. 강의 내용이 심화될수록,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질수록 나는 이곳에서 버티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괜찮다고,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나약한 위로만을 반복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열심히 자료조사해서 써낸 나의 리포트가 내가 봐도 수준 이하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공부하려 마음을 먹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낯선 용어들에 한숨이 나올 때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내게 건넨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 정도 빠르기, 그 정도 어휘력으로 내가 받아치지 못할 때마다 너무 비참할 것 같았다.
여행이 너무 길어서인지, 내가 많이 약해진 건지, 내가 너무 환상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는지, 마냥 좋아 보인다고 하는 그 말이 나는 너무나 서운하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훨씬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하고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피우고 징징거리기만 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이 여독이 풀릴 때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이 고독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