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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문디 Mar 31. 2022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2

이렇게 좋은 날에 #2017. 02.28

눈치는 없는 편인데 감은 있는 편이다. 이를테면 이건 하면 안 되겠다, 이 사람은 피해야겠다 등의 느낌은 대체로 잘 맞는다. 오늘 집을 나설 땐 왠지 안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멜버른인데도 며칠째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었고 내가 언제 또 이런 여유를, 이런 날씨를 즐길 수 있을까 싶어 이렇게 좋은 날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절반이 넘게 남은 식빵을 해치워야겠다 싶어 아침에 먹으려고 보니 살짝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내일까지 두면 안 될 것 같아 아침에 곰팡이 핀 부분을 떼어내고 세 조각, 점심에 세 조각을 먹었다. 빵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데 호밀식빵을 잼도 없이 크림치즈만 발라 먹으려 하니 고역이었다. 결국 남은 식빵은 아깝지만 버렸다. 그러고 문을 열고 나가는데 막연히 안 좋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역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1. 버스를 기다리다 오지 않아 걸어가기로 했는데 걷기 시작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버스가 내 옆을 지나갔다.

2. 하이포인트 쇼핑센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나 여기서 일하고 싶어!!라고 당당하게 말한 후 가방에서 이력서를 찾았는데 이력서를 집에 두고 왔다. 

3. 나중에 다시 와도 괜찮다는 말에 나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바로 집으로 갔다 오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고 또 20분을 기다렸다.

4. 그렇게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잠깐 한눈파는 사이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버렸다.

5.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열쇠를 돌렸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인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결국 세레나 언니에게 연락을 하고 나는 2시간 정도 밖에서 서성였다. 한국이었다면 짜증이 확 솟구쳤을만한 상황이었고 정말 바보 같다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곳에선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 뭐 하하하 웃고는 집 앞 마트에 가서 며칠째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케이크를 사서 먹었다. 그러고는 이 한적하고 예쁜 마을을 휘적휘적 걸어 다녔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예쁜 집들이 펼쳐진 이 조용한 마을의 사진을 열심히 찍었고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며 그네를 탔다. 나조차 인정해주지 않던 그간의 노력과 성과들이 푸른 하늘과 반짝이는 햇살에 바스러지는 것처럼 느꼈다. 


바쁘게 사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함에 쉴 틈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었던가. 앞만 보고 달려오다 내가 놓쳐버린 기쁨들은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일까. 사소하게 꼬여버린 일들 덕에 이렇게 좋은 날에 혼자만의 좋은 시간을 보내며 또 하나의 추억을 쌓는다. 지금 이 순간보다 행복할 내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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