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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문디 Apr 07. 2022

세계 행복의 날, 핑크 호수

#2017. 03.20

멜버른에는 핑크 호수가 있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으니 접근성도 좋아 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뭐 나는 과학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 어떤 원리로 호수가 분홍 빛으로 물드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염분이 많아서 날이 더우면 그렇게 변한다고 들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날이 그리 덥지 않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분홍빛으로 변하지 않았다던데 올해, 다시 호수는 분홍색을 띤다는 소식이 있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호수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 봐야겠다 싶었다. 주말 내내 게으름을 피우다 월요일엔 꼭 보러 가야지 다짐했지만 월요일 아침, 날은 덥지 않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핑크 호수를 못 보게 될 줄 알았다. 아쉬움 가득, 귀찮음에 좋은 날 좋은 구경 하러 가지 않은 나에 대한 원망. 결국 오전 시간을 집에서 보냈는데 하늘이 다시 맑아지기 시작했다. 곧장 핑크 호수로 향했다. 


버스 종착역에서 내려 깊숙이 들어가는데 헨젤과 그레텔이 이끌렸던 과자집이 꼭 이런 숲 속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공원은 방문자들을 안으로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찾아온 손님이 길을 잃을까 넓지 않은 숲 길에 누군가 우유갑으로 방향을 표시해두었고, 그 귀여운 표지를 따라 걷다 보니 커다란 담수 호수가 나왔다.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인 푸른 물빛과 둥둥 떠 다니는 오리 가족은 한 폭의 그림으로 어우러져 거대한 둥지를 이룬 것 같았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헬맷을 쓴 채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있는 부자를 지나쳐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핑크 호수가 나오는 것인지 구글맵을 보며 걷다가 이 쪽으로 가는 걸까 고개를 돌리자 분홍빛이 내 눈에 담겼다. 

순간 누군가 내 심장을 탁 친 것처럼 쿵 내려앉았다. 

뭐가 이렇게 예뻐, 설레게.


물을 탄 딸기우유 같은 반투명한 호수를 바라보며 혼자 사진을 찍으려 낑낑대는데 한 여자가 내가 찍어줄게 라며 말을 걸었다. 만다린어로 말해줄까?라고 말한 것을 보니 중국인인 듯했다. 한국인들이 사진을 가장 잘 찍는다는 진리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결과물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누군가 건넸던 호의는 호수를 더 예쁜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내가 오는 걸 알고 호수가 이토록 설렘 가득한 색으로 변한 것일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집에 돌아와 문득 달력을 보았는데 오늘이 세계 행복의 날이라고 한다. 잠깐 멈춰서 오늘 하루의 행복을 찾아보라고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해가 고개를 내밀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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