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수 있음의 가능성을 지키는 일, 위축되지 않는 상상력의 영토
예술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가요?
효율성이 최고의 미덕인 시대, 우리는 무엇이든 ‘용도’를 묻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정책은 수치로 증명되어야 하고, 투자는 수익으로 환산되어야 합니다. 이 냉혹한 잣대 앞에서 예술은 자주 길을 잃곤 합니다. 누군가는 예술을 정치적 메시지의 도구로, 누군가는 경제 활성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예술이 무언가의 '수단'이 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예술은 그 본연의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오늘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예술이 가진, 가장 고귀한 '쓸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목적 그 자체로서의 예술: ‘쓸모없음’의 역설적 가치
예술은 그 무엇의 수단도 아닌 목적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정치적 이념이나 특정 진영의 이해관계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예술이 권력의 선전물이 되거나 외부 목적을 수행하는 기능으로 환원되는 순간, 예술은 본래의 숭고함을 잃기 마련입니다. 예술의 가치는 효용이나 결과가 아니라, 자율적 생성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예술의 ‘쓸모없음’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사회의 가장 큰 ‘쓸모’가 됩니다. 모든 것이 효율과 이윤으로 환산되는 시대에, 예술이 자율성을 지킬 때 비로소 사회는 일률적인 가치 체계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상상력을 공급받는 숨구멍을 확보합니다.
칸트는 인간의 존엄이 타율이 아니라 자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목적을 외부로부터 부여받는 존재는 수단에 머물지만, 스스로 목적이 되는 존재는 존엄을 지닙니다. 저는 예술 역시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자유의 실질적 조건: ‘비지배’와 생존의 문제
그러나 예술은 현실과 단절된 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사회적 존재이며, 생존 조건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인간은 사회·교육·문화·계급·시대 분위기 속에서 형성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을 인식하고 반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 압박은 자유를 왜곡합니다. 형식적으로 선택지가 존재하더라도,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의 선택은 온전한 자율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페팃은 자유를 단순한 간섭의 부재가 아니라 ‘지배되지 않는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겉으로 선택이 허용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선택이 구조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예술의 자유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을 지속할 수 없는 조건은 예술가를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지배합니다.
국가의 역할: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자율적 거버넌스’
따라서 국가는 예술의 내용을 설계하거나 방향을 규정해서는 안 되지만, 예술가가 예술을 전업으로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보장해야 합니다. 이는 예술을 통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이 권력과 시장에 포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이를 위해 국가의 지원은 ‘관료의 시각’이 아니라 ‘현장의 자율적 거버넌스’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지원의 기준 또한 결과물의 효용이 아니라 예술적 시도 그 자체의 독립성에 두어야 한다. 시장은 예술의 가치를 완전히 보존하지 못하며, 생존 불안은 자기 검열과 위축을 낳게 됩니다. 예술이 위축되는 것은 개인의 좌절을 넘어, 사회 전체가 다양한 사유의 가능성을 잃는 일입니다.
관계와 독립: 도구화되지 않는 유연한 연결
예술은 정치, 종교, 시장, 이념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넘나듦은 종속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술은 관계 맺을 수 있지만 소유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것, 국가 이념을 표현하는 것 역시 예술가의 자율적 의지라면 문제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외부 권력이 방향을 정하는 경우입니다. 비자발적 도구화는 곧 통제입니다.
책임 있는 자유: ‘해악의 원칙’과 시민적 의무
동시에 예술의 자유는 무제한적 방임을 뜻하지 않습니다. 밀은 자유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이 원칙을 예술에도 적용하려 합니다. 예술은 가능한 한 넓게 허용되어야 하지만, 타인에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피해를 주는 경우에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해악’은 단순한 불쾌감이나 도덕적 엄숙주의가 아니라, 헌법이 보호하는 타인의 실질적 권리에 대한 명백한 침해로 엄격히 한정되어야 합니다. 예술가는 시민이며, 공동체의 최소한의 법적 질서를 수용해야 합니다. 법이 부당하다면 비판할 수 있으나, 그에 따른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자유는 책임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음’의 가능성을 지키는 일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예술이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위축되는 것입니다. ‘사회적 해악 가능성’과 같은 모호한 기준이 확대될수록 예술은 스스로를 검열하고 탐색을 멈추게 됩니다. 가능성은 닫히는 순간 쉽게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예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경계를 시험하며,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는 공간입니다. 그 ‘될 수 있음’이 사라질 때, 예술의 본질도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지켜야 할 것은 나 자신의 예술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영역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술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위축되지 않도록 사회는 생존 조건을 보장하되 의미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술은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으면서 모든 것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열린 영역이어야 합니다. 그 열림이 유지되는 한, 예술은 여전히 목적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