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쿄에 사세요?" 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대단한 성공은 없어도, 제 삶을 단단하게 채워주는 것들

by 쿠로사와 세키나리


도쿄에 삽니다, 그리고 매일 만족합니다


"왜 도쿄에 사세요?"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저는 잠시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처음부터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흐르듯 이곳에 정착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도쿄의 평범한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 삶을 채우는 이 도시의 매력이 무엇일지 곰곰이 헤아려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실은 제 삶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소소한 만족감들. 오늘은 그 열 가지 이야기에 대해 조심스럽게 꺼내보려 합니다.


사소한 자신감을 되찾다


조금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한국에서 늘 제 키(175cm)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컸더라면' 하는 생각은 떨치기 힘든 그림자 같았죠. 하지만 도쿄의 지하철을 타고, 시부야의 인파 속에 섞여 걸을 때면 신기하게도 그 그림자가 옅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일본의 평균 신장이 한국보다 조금 작다 보니, 이곳에서 저는 어느덧 '큰 키'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도 시야가 뻥 뚫리는 듯한 느낌, 옷을 살 때 더 이상 팔 기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누군가에게는 별일 아닐지 몰라도, 제게는 잃어버렸던 작은 자신감을 되찾게 해준 고마운 변화였습니다.


골목길의 포근함 속으로

한국의 스카이라인이 곧게 뻗은 아파트들로 채워져 있다면, 도쿄는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모여 만든 정겨운 '마을'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역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길, 높고 낮은 지붕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골목을 지날 때면 마치 따뜻한 품에 안기는 듯한 안락함을 느낍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따스한 불빛과 현관 앞에 놓인 작은 화분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빽빽한 아파트 단지가 주는 편리함 대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마을의 포근함은 도쿄가 제게 선물한 가장 큰 위로 중 하나입니다.


맑고 투명한 하늘 아래

"오늘 하늘 정말 예쁘다."

도쿄에 살면서 입에 달고 사는 말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 살 때는 봄이 되면 으레 찾아오는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에 파란 하늘을 보는 날이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창문을 여는 것조차 망설여지던 날들이었죠. 하지만 도쿄의 하늘은 대부분의 날, 거짓말처럼 맑고 투명한 얼굴을 보여줍니다. (물론 규슈 지방은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까워 영향을 받을 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 커튼을 걷었을 때, 투명한 햇살이 방 안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의 행복. 그것만으로도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새로운 길


가끔 주말이면 무작정 차를 몰고 나섭니다. 도쿄는 거대한 도시이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하코네의 온천, 가마쿠라의 고즈넉한 사찰, 쇼난의 푸른 바다 등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 매력적인 장소들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일본은 넓은 땅만큼이나 다채로운 풍경을 품고 있어, 주말마다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떠나는 '드라이브의 재미'가 쏠쏠합니다. 막히는 길 위에서 스트레스받기보다, 잘 닦인 도로를 달리며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완벽한 휴식이 되어줍니다.


도로 위에서 배우는 배려


도쿄의 도로 위에서는 좀처럼 경적 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방향 지시등을 켜면 뒷 차는 당연하다는 듯이 공간을 내어주고, 좁은 골목에서 마주친 차들은 서로 먼저 가라며 손짓을 건넵니다. 처음에는 이런 운전 매너가 신기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저 역시 자연스럽게 양보하고 기다리는 운전자가 되었습니다. '나 먼저'가 아닌 '우리 함께'라는 암묵적인 약속이 존재하는 도로. 서로를 향한 작은 배려가 모여 만드는 이 평화로운 질서는, 운전뿐만 아니라 일상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일상이 되는 푸른 필드


한국에서 '골프'는 여전히 값비싸고 특별한 사람들이 즐기는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골프는 훨씬 더대중적이고 저렴한 레저 활동에 가깝습니다. 평일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저렴한 가격으로 라운딩을 즐길 수 있고, 주말에도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합리적인 가격의 골프장을 쉽게 찾을 수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골프장이 많은 나라라고 합니다.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고, 접근성이 좋다는 의미겠죠. 덕분에 저는 주말 아침, 동료들과 함께 푸른 잔디를 밟으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호사를 누리곤 합니다. 값비싼 취미가 아닌, 즐거운 일상의 스포츠로 골프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도쿄 생활의 만족도를 크게 높여주는 요소입니다.


우리 집을 꿈꿀 수 있는 곳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고 중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집 마련'이라는 꿈. 서울의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현실 속에서, 많은 청년들이 내 집 마련을 포기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종종 듣습니다. 하지만 도쿄는 상대적으로 그 벽이 낮게 느껴집니다. 여전히 낮은 금리를 유지하고 있고,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합리적인 가격의 주택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물론 도쿄 역시 세계적인 대도시이기에 집값이 만만치는 않지만, 성실하게 일하면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준다는 것. 이 사실하나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집니다. (금리와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깊이 나눠보겠습니다.)


도쿄라는 이름이 주는 설렘


화려한 네온사인과 최첨단 기술, 그리고 수백 년의 역사가 공존하는 도시. 도쿄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매력적인 곳입니다. 퇴근 후, 긴자에서 세련된 칵테일을 즐기기도 하고, 주말에는 시모키타자와의 빈티지 숍을 구경하거나, 고서점이 즐비한 진보초에서 시간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미식의 도시답게 골목마다 숨겨진 맛집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죠. 이 거대한 도시는 언제나 새로운 영감과 즐거움을 선사하며, 평범한 일상에 특별한 색을 입혀줍니다.


눈 대신 햇살이 가득한 겨울


저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입니다. 그래서 눈이 내리지 않는 도쿄의 겨울이 참 좋습니다. 물론 도쿄도 겨울은 춥지만, 한국의 칼바람 부는 혹한에 비하면 훨씬 온화하게 느껴집니다. 두꺼운패딩 대신 가벼운 코트 하나만으로도 겨울을 날 수 있다는 것, 눈길에 미끄러질 걱정 없이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행복입니다. 춥고 긴 겨울밤 대신, 맑고 건조한 햇살이가득한 겨울 오후의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제가 사는 도쿄입니다.


결국,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시간


도쿄에서의 삶을 하나씩 나열하고 보니, 제가 이곳을 사랑하는이유는 결국 '균형'이라는 단어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사소한 자신감을 되찾게 해주는 관계의 균형, 화려한 도시와 아늑한 마을 사이의 균형, 그리고 일과 삶, 꿈과 현실 사이의 균형.


물론 타향살이의 외로움이 불쑥 찾아오는 날도 있고, 복잡한 행정 절차에 머리가 아플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울 위를 오가던 추가 결국 '만족' 쪽으로 기우는 것은, 이 도시가 제게 허락한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들 덕분일 겁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분명 그런 도시, 그런 공간이 존재하리라 믿습니다. 당신의 일상을 만족감으로 채워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문득 궁금해지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