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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병원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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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Z Jun 09. 2020

겨울딸기

겨울딸기

딸기: 『식물』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 줄기는 땅 위로 뻗으며, 잎은 세 개씩 붙은 겹잎이다. 봄에 흰색 꽃이 취산(聚繖) 화서로 피고 열매는 공 모양 또는 달걀 모양의 장과(漿果)로 붉게 익는데, 날로 먹거나 잼을 만들어 먹는다. 남미가 원산지이다(표준 국어 대사전) 


며칠 전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아빠 돌아가시기 전에 딸기 드셨으면 안 됐을까?”


누나는 그 겨울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겨울, 외국에서 살던 조카가 한국에 와서 항암치료 중이시던 아버지와 일주일을 함께 하던 그 겨울 이야기였다. 딸기가 없는 나라에서 지내던 조카는 딸기가 먹고 싶었지만, 혹시 항암치료 중이시던 할아버지가 드시고 싶을 까 봐 말도 못 하고 일주일을 보냈다. 조카가 돌아가기 전날 늦은 밤, 딸기가 먹고 싶지만 말도 못 한 손녀가 맘에 걸린 엄마는 아버지 몰래 딸기를 씻어 모두가 잠드신 시간, 어두컴컴한 부엌 바닥에 앉아 손녀의 입에 넣어주셨다는 이야기. 처음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뭉클한 마음에 아버지가 보고 싶어 졌다.


처음 아버지의 폐암을 의심한 것은 나였다.기침을 많이 하시고 수십 년 피워온 담배를 끊지 않으셔서, 반강제로 아버지는 폐 CT 검사를 했다. 첫 영상을 본 날, 아주 작은 의심할 만한 병변을, 몇 번을 보고또 보았다. 아버지는 그날로 담배를 끊었다. 하지만 그 작았던 병변은 야속하게 몇 년 후에는 암으로 변해 버렸다. 나의 스승님들이 아버지의 수술을 해 줬고, 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환자가 되어 버렸다.


4주에서 6주 간격으로 여섯 사이클. 아버지가 극복해야 할 아니 가족이 극복해야 할 항암치료의 여정이었다.

“육 개월 넘게 걸릴 것이고요. 항암 치료할 때는 생식을 하시면 위험하고요.”

담당 전공의의 설명속에 나도 전공의 때 환자들에게 쉽게 쉽게 말했던 문장들려왔다. 그 쉬운 문장이 내가 보호자가 되자 도대체 무슨 의미인 지를 이해하기 어려워져 버렸다.생식이란 의미가 생선회는 먹어도 되는 것인지, 육회를 먹지 말라는 것인지, 생과일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인지, 아니면 껍질 있는 과일은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두 혼란스러웠다. 물어보아도 찾아보아도 모두 대답이 달랐다. 그저 충분한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시되 되도록이면 생식을 하지 않는 선에서 음식을 조절하라는 애매한 답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날고기를 먹지 말고 흙에서 바로 나온 과일은 먹지 말자고 가족끼리 약속을 했고, 그렇게 원칙을 지키며 6개월을 한참 넘겨 여섯 사이클의 항암치료를 아버지는 무사히 끝을 내셨다. 그 시간은 정말 두렵고 지루했다.


아버지는 원래 모든 음식을 다 좋아하시는 사람이었다. 눈앞의 음식을 항상 기분좋게 맛있게 드셨다. 특히 생선회와 중국음식을 정말 좋아하셨다. 아버지의 항암치료 마지막 사이클이 끝나고 3주 후, 항암치료가 끝난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우리는 꽤 좋은 일식집에서 작은 파티를 했다. 거의 8개월 만에 아버지는 생선회를 들었다. 많이 드시지도 그렇게 맛있게 드시지도 못했지만 다시 생선회를 드시게 됐다는 사실 때문인지 나와 아버지는 서로 뭉클했었다. 술도 한 모금을 곁들였고 그날 꽤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생선회가 아버지의 마지막 생선회였다.


얼마 후 아버지는 CT를 찍었다. 암은 금세 재발되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끝이 없는 항암이 시작됐다. 암 이란 것들은 정말 지겹도록 생명력이 강해 항암을 하면 사라졌다가 다시 다른 쪽으로 나타났고, 또 숨어있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서 병과 싸우셨고 우리가 함께 정한 대로 날 음식과 바로 땅에서 나온 과일은 드시지 않았다. 내가 의사여도 우리의 기준이 얼마나 적절한지는 몰랐지만 우리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지하고 함께했다.


어버이날이 되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중국음식점을 예약했지만 그 예약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나가실 수 있는 상태는 아니셨다. 우리는 모든 음식을 직접 집으로 가져왔고 아버지는 마지막 어버이날을 좋아하던 중국음식과 가족들과 함께 보내셨다. 물론 많이 드시지는 못하셨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누나가 문자로 물어왔다. 만약 아빠가 딸기를 맘대로 들었다면 돌아가신 날이 바뀌었을까?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뜬금없이,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서 병과 싸우신 꽤 훌륭한 환자'라고  문자를 보냈다.

누나가 지금도 엄마는 겨울딸기를 보면 어차피 5개월밖에 더 못 사실걸 딸기도 못 드시게 하고 손녀는 부엌 바닥에서 궁상스럽게 딸기를 먹였던 것이 속이 상 하다고 말하신다고 했다. 그 딸기를 손녀랑 앉아서 맛있게 드셨으면 더 힘이 나셨을지도 모른다며.


어쩌면 누나의 말이, 엄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아버지가 본인도 두렵고 슬펐지만 마지막 날까지 스스로의 원칙을, 최선을 다함을 가족에게 보여주신 것이 고맙고, 최선을 다한 멋진 환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을 다시 누나에게 문자려다 지웠고 한참 눈물이 났다.


그래도 역시 아버지가 보고 싶고, 겨울딸기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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