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추던 기억의 조각들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나타는 일련의 사건과 흔적들을 정지아 작가만의 느낌으로 녹여낸 이야기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습니다. 애석하지만 친근하고, 나도 모르게 피식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 편의 소설에 대해 잠시 끄적여봅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추천 대상
1. 정지아 작가가 경험한 세상을 듣고 싶으신 분
2. 사상과 사람에 담긴 가치를 느끼고 싶으신 분
3. 아버지를 마음에 품지 못하신 분
나를 비추던 기억의 조각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를 읽고.
작가 '정지아'는 1965년생,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1990년 '빨치산의 딸'이라는 장편 소설로 데뷔했다. 데뷔작 '빨치산의 딸'에서 빨치산의 딸은 실제 자신이며, 이적 표현물로 지정되어 판매금지 10년을 당하고 2005년에 재출간했다. 또한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으며,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등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진보와 보수, 그것을 뛰어넘는 '인심', 사상과 사람 냄새가 가득한 이야기 속에서, 여순 사건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책을 읽어갈 필요가 있겠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고상욱'을 둘러싼 이야기와, 아버지로 인해 연결된 이상한 관계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들. 작가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맺기까지, 거미줄처럼 엮어있는 주변의 관계들을 무덤덤하면서도 조화롭게 나타내었다. 그리고 비로소 '아버지'라는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전라도 사투리와 낯설지 않은 사람 냄새에 장면 하나하나가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여순사건(麗順事件)은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 ·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이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읽으먼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하는 것이여.
<아버지의 해방일지>, p137
아버지 '고상욱'은 철저한 사회주의자이고 현실적이며,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미련 없이 베풀며 그 책임을 평생 동안 짊어진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빚을 떠넘기고 도망간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 마을 사람들에게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비치어 보이지만, 자신의 동생에게는 원수 같은 존재로 비추어지는 사람이다. 사람을 편견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의 방식은 누군가에게 진심의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 중 하나는 문상객으로 찾아온 노랑머리 '아이'이다. 노랑머리에 베트남 어머니를 둔 그는 미성년자이지만, 아버지 '고상욱'과 담배 친구였다. 아버지는 지난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저마다의 사정을 이해하는 편을 선택하였고 그렇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인심을 얻어 갔던 것이다.
아버지가 '빨치산'이라는 것으로 인해, 그의 가족들은 많은 영향을 받았고 아버지와 6년이라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전에 순수했던 아버지와의 친근함은 그가 복역한 이후, 이전처럼 되돌아올 수 없었다. 그렇게 희미해졌던 아버지의 존재는 영정사진에 담겨서야 비로소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동안 아버지를 바라보았던 흩어졌던 시선들이, 조금씩 아버지의 존재로 모인다.
이야기 중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잠깐 언급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그러한 노력들이 불타버린 후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하여 처형된 도시 빈민이다. 아버지는 그를 보고 덤덤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라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아버지 '고상욱'은 어떠했을지 묻는다.
또 올라네
<아버지의 해방일지>, 197p
조문이 끝난 문상객들은 저마다 다시 오겠다고 전한다. 한 번으로 족하지 않은 그들의 심정을, 설령 그것이 미움일지라도, 어떠한 우정 또는 은혜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일 것이다. 너무나 얽혀서 끈질긴 인연들을 무겁지만 부러워하는 그녀의 심정이,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을 대변한다.
아가, 짝은아배가 큰맘 잡수셨응게 그리 허자이. 그래도 혈육인디 항꾼에 묻히면 안 좋겄냐?
<아버지의 해방일지>, 216p
작중에 '항꾼에'라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은 '함께'를 의미하며,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이들이 조문을 올 때도, 다음에 볼 언젠가를 기약하는 순간에도 나타난다. 화장을 마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의논하는 순간에도 그러하다. 혈육과 항꾼에 묻힐 것인지, 유물론자답게 사방팔방 자유로이 흩날릴 것인지. 작가는 그제야 자신을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의 감정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냉정한 합리주의자 아버지, 나와 결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작가는 아버지에게 자식보다 더 자식 같은 '학수'가 바라보는 자신이 어떠했을지, 그동안 아버지의 '딸'로서 자신은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한다. 어떤 딸인지 보다 누구 딸인지가 중요했고, 그 굴레가 무거웠던 그녀는 그런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 시골 골짜기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며 발버둥 쳤던 것이다. 그것이 답답했던 것이라고, 변명할 기회조차 사라진 이 상상에서 그녀의 얼굴에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잃어버린 6년의 시간이, 너무나 애석하고 또 그립지만 아버지 '고상욱'은 어떠했을지. '사무치게'라는 말이 감옥에 갇혔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감히 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안다. 죽음으로써 부활한 아버지의 존재가, 그동안의 기억 속에 담긴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265p
그러니깐,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우리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고 발버둥 치기 바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참 오랫동안 곁에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비추는 모습은 내가 아는 모습과 또 다른 것이다. 차마 어려울 것이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죽어서는 어떠한 파장도 느껴지지 못하는데, 그것에 닿아보려고 애절하게 '아버지'를 불러본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좋은 울림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통해 해방된 것은 아버지일까, 작가일까. 사상과 사람 내음 가득한 한 편의 소설에서, 나는 약해지고 무뎌지는 사람의 인생에 담긴 불변의 강인함을 보았다. 언젠가는 좋은 울림을 전할 수 있다는 것에 안주하고, 또 한 편으로 상황을 탓하지 않았나. 차마 보이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나를 찌르던 날카롭던 기억의 조각들이 다시 모이는 것은, 죽음으로써 생생해진다. 부정의 응어리들을 내려놓고 온전한 존재로 당신을 바라볼 것을, 지나간 시간에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 아닌지 생각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통해 전달된 온기는, 차가운 시스템 속 오만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잠시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나를 비추던 기억의 조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