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가 맞나 의심스러워 (1)
아무 일도 없을 거야
2020년의 가을이 저물어간다.
이제는 익숙해진 갑갑한 마스크를 쓰고
이렇게나 '거리두기'라는 단어를 자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넓게 보면 모두가 시름의 영역에 들어간 팬데믹이었는데
일상에서 겪는 개인의 다양한 아픔과 별일들은
섭섭하게 묻어두고 살아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 어김없이 찾아든 가을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늦가을이 떠난 자리에 부쩍 차가워진 바람이
힘껏 자라난 20년 산 나뭇잎들을 부지런히 털어내고 있었다.
외출 후 집에 들어와 보니
할미는 주방 식탁에 놓인 수건을 가리켰다.
양손을 적당히 벌리며 이만큼 두툼한 돈봉투를 주워왔는데
너무 떨려서 청심환까지 먹었다고 했다.
돈 주인이 쳐들어올까 겁이 나서 이렇게 숨겨놓았는데
어떡해야 하냐고 야단이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왜 하필 할미 눈에 돈봉투가 보였다는 건지.
놀란 마음으로 수건을 조심히 들어 올렸더니
정말 돈봉투 재질의 부스럭거리는 촉감이었다.
다만 지폐에서 갓 구워온 곱창김마냥
따끈한 온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나름 할미가 고심한 상황극이었다.
난 걱정스러운 척 맞장구 쳐줬다. "이게 다해서 얼만데?"
혈중웃참농도가 넘어선 할미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칠백...." 정도를 말하다 웃음을 터뜨렸다.
같이 먹고 싶었던 붕어빵이 식을까 봐 수건에 감싸둔 것이었다.
한때는 이 수건으로 칼자루를 감던 할미가
예전 귀여운 폼을 잃지 않아 보여서 기쁘고 감사했다.
그 사이 할미는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동네 역 근처 주차장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던 할머니와 친구가 되었다.
그곳은 내가 어느 방향으로 집을 향하든
할미가 동선을 훤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나 혹은 내 차를 발견하면 기막히게 알아보고 함께 집으로 향했다.
할미의 저린 다리는 완치를 기대할 수 없이
점차 악화될 일만 남았지만,
되도록 집에서 가까운 거리라도 걸어주겠다는 의지가
붕어빵 할머니를 만나게 해 줬다.
그즈음 나는 사실 할미에게 제안하고 싶었던 일이 생겨 며칠 고민 중이었다.
얼마 전 치매안심센터에서 무료검사를 받아보라는 우편물을 받고 난 후였다.
할미가 혼자 지낼 때도 이 안내문은 받아봤을 테지만,
할미 선에서 가볍게 넘기고 검사를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보기에도 할미가 이상징후를 보인 적은 없었으므로
치매검사에 대한 필요를 느껴본 적이 없다.
지금도 변함없이 화투판에서 맹활약하는 모습이나
혼자서 샤워나 마실 등이 무리없는 걸 보면 안심되긴 하지만,
아니면 다행이니 받아는 봐야겠다라는 몇 가지 징후가 보였다.
긴가민가하지만 어쨌든 내 기준 단계별 치매의심일지는 이렇다.
[단계 1]
할미가 퇴근한 나를 보더니 "살아있었구나~~" 외치며 운다.
그날 도착한 택배에 적힌 송장번호와 내 이름을 보고
내가 이 세상 목숨이 아니라 착각했다.
이게 말이 되나?
한 번은 도착문자가 온 택배가 보이지 않아
할미에게 물어보니 아무것도 오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난 문제없이 배송했다는 택배기사님과의 통화까지 마치고
혹시 몰라 신발장을 열어보니 찾던 택배가 나타났다.
이건 사실 건망증인지 어깃장인지 판별이 안된다.
[단계 2]
출근 전 아침, 할미가 만들어준 두부부침에서 충격적인 단 맛이 났다.
결코 헷갈릴 수 없는 기름 대신 올리고당을 집어 들어
프라이팬에 사정없이 두른 것이었다.
나는 조금 태워먹은 건가 싶었던 할미표 두부부침에서
달디달고 달디단 맛이 났던 건 태어나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물론 이 또한 내게 마음에 들지 않는 할미가 꾸민 응징일지 모른다.
[단계 3]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라 했던 집 출입키를 깜빡하고 나온
할미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언젠가 한 번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한 나는 외부에서 업무 중이었고,
안절부절못하는 할미를 발견한 뒷동의 이웃이
우리 동 이웃에게 알려 내게로 보이스톡이 왔다.
나는 통화 너머 할미의 "아구 어지러 아구 어지러. 나 이러다 죽네"를 들으며,
이웃에게 우리 집 도어록 비밀번호를 전체공개했다.
뒷동 이웃의 말로는 할미가 몇 층, 몇 호인 지는 말씀 못하시지만
여기로 들어가야 된다고는 알려주셔서 연락드릴 수 있었다 한다.
사실 이 모든 소동이 치매를 의심할 만한 상황인지 의심스럽긴 하다.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할미만의 독특한 성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성이라고는 없는 내가 판단해서 뭐가 나아지겠나.
또 결정적으로 치매의심증상 항목 중,
할미로부터 겪었던 생소한 경험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검사를 서두르고 싶었다.
성격에 변화가 온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소 성격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매 환자의 경우 성격의 변화의 정도가 정상인보다 뚜렷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의심이 많아지거나 충동적으로 변할 수도 있고, 자신의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거나,
무슨 일이든 따지거나 시비를 걸어 다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합니다.
<참고자료>
중앙치매센터 (2017). 치매 소양기초공통교육 교재
그래서 난 더더욱 전문기관의 판단에 맡겨보기로 했다.
초기라면 빠르게 진행을 늦춰야 하고 괜찮다면 그야말로 괜찮은 거니까.
나는 그동안 권유받은 치매검사를 가볍게 무시하고 넘겼을 할미가
거부감 갖지 않도록 조심히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내 제안을 들은 할미는 쿨하게 답했다. 의외였다.
"공짜면은 받어이지!"
설득의 문턱을 넘은 나는 치매안심센터에 연락했다.
먼저 1단계 선별검사부터 진행한다고 한다.
그 검사를 통해 전문의와 만나는 2단계 진단검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당일 방문도 가능하다는 말에 할미를 데리고 1차 검사를 진행했다.
할미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지금이 봄여름가을겨울 중 언제인지'
'여기는 어디 시인지'등의 질문과 검사 등을 통해
인지저하가 의심된다는 결론이 났다.
이제 전문의가 센터 방문이 가능한 여러 날 중 하루를 정해,
할미의 치매 여부와 단계를 결정짓는 2차 검사를 받아야 한다.
검사를 받기 전날은 많은 눈이 내렸다.
주차 후 할미 손을 잡고 단단히 얼어붙은 빙판길을 조심히 함께 걸었다.
할미가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아무 일도 없을겨.. 괜찮어..."
미끄러우면 조심하면 된다. 넘어지지 않도록.
할미도 나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쉬울 리 없는 우리의 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는 중이다.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아무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자칫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럼 대비하면 그만이다.
걱정된다.
그래도 걱정되지 않는다.
약간의 대기 끝에 할미의 차례가 왔다.
나는 할미와 함께 진단실로 들어가 의사 앞에 나란히 앉았다.
내 자식은 없지만 학부모의 마음이란 게 이런 건가..
우리 할린이가 의사의 전문적으로 설계된 여러 질문에
당차고 알맞게 대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앞선다.
"할머니, 제가 지금부터 주소 하나를 불러드릴 거예요.
제가 말씀드리는 거 따라서 말씀하시면 돼요."
"네네. 슨생님"
"서울시"
"서울시.."
"중구"
"중구.."
"명동 15번지!"
"명동..! 15번지!"
"김철수"
"기임철수!"
"자, 서울시 중구 명동 15번지 김철수.
제가 방금 뭐라고 했죠?"
난 괜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할머니 입술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