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면상담에서의 전생

사실 전생이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이유

by Lyden

최면이라는 키워드를 보면 심리치유 이외에도 떠오르는 화두가 있다. 바로 전생이다. 나는 전생이 있다고 믿지만, 사실 딱히 없어도 상관은 없다.(심지어 나는 종종 전생을 심리학적 원리를 근거로 비판하기도 한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상반되는 태도를 둘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래도 된다. 이래도 되는 이유는 결국 최면상담에서의 '전생'의 역할이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이기 때문이다.


즉, 백날 생생한 전생을 체험한다 하여도, 내담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전생은 '치유를 위한 최면 상담'에서는 없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면세션과정에서 내담자가 전생으로 향했고, 그 결과 문제가 치유됐다면 그때 전생은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즉, 전생은 사실 그것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유용한 것으로 작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생의 존재가 유용하다면 그 것을 신뢰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기에 나는 전생을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전생 체험으로 효과를 보았기에 믿게 되었다. 나의 경우에는 마음속 한가운데에 뻥 뜷린듯한 공허감과 결핍감이 있었는데 최면상담을 받는 중에 전생으로 향했고 전생과의 고리를 분리하자 이 공허감 이슈와 결핍감 이슈가 시라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최면상담에서의 전생이 무엇인지를 보다 심리학적인 이유로 밝혀보려 한다.


1. 타자화


인간은 사랑받고 싶어 한다. 정말로 아무 조건이 없어도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자신의 존재가 그 자체로 괜찮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받아들여짐을 갈망한다. 즉, 조건 없는 수용과 사랑을 근본적인 수준에서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타인을 그렇게 조건 없이 수용해주지 못한다. 심지어는 타인과의 관계를 제쳐두더라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조건 없이 사랑하지 못한다. 남들이 보기에, 세상이 보기에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모습. 그리고 사랑받기에 불충분해 보이는 나의 모습. 이러한 나의 모습들은 나 자신에게 조차도 부정당하고 외면당한다. 그리고 개선과 자기 계발이라는 명분을 사용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한다. 삶은 더욱더 고통스러워진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임을 밝히는 이야기다.


그렇게 사람의 내면에는, 스스로의 모습임이 분명 하나, 그것이 스스로의 모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분리해 버린 자신의 모습들이 있다.


또한, 위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과거에 끔찍한 일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그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 경험을 했던 그 당시의 자신을 전체적인 자아상으로부터 분리시켜 타자화하게 된다.


이때 시간상으로 타자화가 일어나면 전생, 공간상으로 타자화가 일어나면 빙의가 된다.


빙의 같은 경우는 그렇게 타자화된 자신의 성질이 그 사람의 무의식 속의 여러 데이터(정보)들과 얽혀서 자신을 외부에서 온 어떤 초현실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을 때 빙의라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최면 상담과정에서 일어나는 빙의의 99%는 저러한 기전으로 일어난다. 나머지 1%는 최면상담가가 다룰 영역이 아니기에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 좋을 것 같다.


어찌 됐든 저러한 기전으로 타자화가 일어나는 데, 그렇게 타자화된 자신 역시 실제로 어떤 경험을 한 자신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의 모습은 말 그대로 '스스로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것이 상담 중에 드러나는 과정상에서도 '전생이라는 서사' 또는 '나름대로 억울한 일을 겪은 영혼이라는 서사'로 은유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즉, 무의식이 스스로에게 타격을 입히지 않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도의 내용으로 '자기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무의식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세계관에 어울려서 전생과의 인연을 달래주고 정리하거나 억울한 영혼을 달래주고 돌려보내거나 해도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형태만 저러한 형식으로 나타났을 뿐, 결국 외면되고 있었던 자신의 일부(마음=존재)가 누군가에게(특히 내담자 자신)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전생이나 빙의라는 세계관을 통해 치유가 일어난다. 이것이 전생이 진짜인가 빙의가 진짜 있는가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사실 별 의미 없는 이유이며, 있어도 없어도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분명 이러한 세계관이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는 있기에, 전생이든 빙의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